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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문화 평론가 앨빈 토플러가 1980년에 쓴 <제3의 물결>은 당시 전 세계 학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인류의 삶의 방식이 제1의 물결 농업혁명을 거쳐, 제2의 물결 산업혁명이라는 대변혁 시대를 이미 오래도록 지나왔고, 이제는 제3의 물결 새로운 후기 산업화 사회라는 역사적 변혁을 향해 갈 것이라 예견한 것이다. 생산, 분배, 소비, 교육, 문화면에서 탈 대량화와 다양화 현상이 일어나고, 기술적으로 전자혁명 등 고도의 정보화 기술이 일반화되는 등 반산업주의의 성격으로서 역사상 가장 바람직한 지역공동체가 더욱 강화된다는 내용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각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얼핏 보면 빛이 바랜 것 같은 옛 고전들을 여전히 중요한 학문적 근거로 삼은 채, 현대 과학 문명 속 한 자락에 생생히 자리 잡고 있는 우리 한의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이 물결 속에서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첫 여성 교수로 임명받고 드디어 경혈학교실이 문을 연 1987년 봄, 침구 동인 80개와 동인 보관장, 그리고 실습 침대 30여 개를 들여놓고 가슴 뿌듯하게 바라보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학관 내에 실습할 시설이나 도구도 없던 우리의 1970년대 학창 시절, 간호학과 실습실을 어렵게 빌려 가며 빈약한 실습수업을 받아야 했던 기억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뿌듯함도 잠시, 놀랍게도 그즈음의 세상은 엄청난 변화의 홍수를 겪고 있었다. 마치 ‘변화’라는 씨앗이 팬데믹처럼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닌 모양이 그랬을까.

1989년 독일이 역사적 통일을 이루고 브란덴부르크 장벽이 무너지면서 서로를 포옹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우리도 함께 감격적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국 소련 간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냉전 시대의 종식이 선언되더니, 이어서 2년 뒤에는 드디어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중국의 덩샤오핑이 주창하던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으로 자유무역과 부패·비리 사건들이 뒤얽히면서 폭발하는 가운데 천안문 민주화 시위 사건마저 같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이러한 전 지구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의학의 사회적 시스템과 위상에도 커다란 강박적 상황이 도래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생들을 제대로 잘 가르쳐 침 잘 놓는 한의사로 만드는 교육자적 사명, 문헌에 기록된 채 대대로 내려온 수많은 치료 처방의 효과 기전을 과학적 방법과 용어로 설명하고 더욱 개발해야 하는 연구자로서의 사명, 그리고 나아가 전 지구를 상대로 한의학의 우수성과 가치를 홍보하며 새로운 의학 패러다임을 끌고 가려는 한의학 세계화의 사명들이 당시 불고 있었던 세계적 변화의 흐름 속에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흥미가 매우 고조되어 있던 그 시기, 대중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끌던 책 한 권이 있었으니 바로 <경락의 대발견>이다. 당시 북한의 김봉한 선생이 발표했다는 봉한학설 내용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재번역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경락학설의 구조적 실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실제로 본 연구에 몰입한 몇몇 학자들 - 특히 한의계 외의 사람들 - 은 새로운 방향의 의학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잡은 양 정부의 연구비까지 수주하면서 매우 흥분된 모습이었다. 봉한학설 연구자라며 이 실험을 재현해 보겠다고 방문한 일본의 몇몇 학자들로 인하여 우리 연구실도 마찬가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들이 시현한 연구 방법들은, 거의 다 기초적 수준에 머문 채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이 애꿎은 토끼 여러 마리만 희생시키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곤 했다. 어쨌건 우리 한반도에서는 그 뒤로도 봉한학설, 또는 그와 유사한 제3의 순환구조를 재현시켜 경락이라 이름 짓고 싶어 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아직은 어떤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못한 상황이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는, 1970년대의 몸속 천연 아편제 수용체 연구를 시작으로 침 진통 연구가 함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을 발판으로, 미 국립보건원에도 대체의학부까지 만들어져 대량의 연구비가 책정되었다. 신경학설이 중심이 되어있는 통증 제어 연구가 면역학과 정신과학으로까지 연결되어 유기체의 전체성을 주장하면서 ‘Neuro-Immuno-Psychology’라는 학문 분야가 새로이 대두되는 가운데, 침 진통 연구는 더욱 확장되어 약물, 니코틴 및 알코올 등 중독성 조절에 침 효과의 가능성이 타진되면서 관련 연구비를 찾아 전 세계에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계보건기구 (WHO)에서도 이 움직임을 일찍이 간파했었던 것 같다. 이침 요법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폴 노지에의 아들 라파엘 노지에 의사를 만난 것도 교수로 발령받았던 그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침구의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 당시 WHO 대체의학 파트에서도 침구 경락 용어의 표준화 및 위치의 객관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마침 경희대 강성길 교수와 함께 그 미팅에 temporary advisor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소공동 롯데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있었던 그 회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이한열의 최루탄 부상 (한 달 뒤 사망)을 계기로 대규모 6월 민주 항쟁이 발발했던, 결국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 등이 있던 바로 그날에 열렸었다. 길을 가던 모든 자동차의 경적과 광화문, 시청, 남대문 전역을 잇는 시위 인파의 함성의 의미를 회의에 참석했던 외국인들에게 열심히 설명해 줬기에 더욱 잘 기억한다.

한의학에 몸담은 모두가 알다시피 이침 요법의 학문적 근거는 한의학의 유기능체계 이론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인데 왜 프랑스 사람이 창안했다고 나오는 것인지 당시엔 좀 의아했었다. 나중에서야 조금 이해된 것은, 죽의 장막 속에서 외부와의 원활한 소통이 거의 없던 시기의 중국이 프랑스와는 상당히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 중의학 서적도 불어로 많이 번역되었고 침술에 도전한 학자들도 다수 발생하여, 이에 선구적으로 폴 노지에가 프랑스 마르세유 학회에서 이침 분구 요법의 임상응용을 발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국교 수립 (1992년) 직전이었던 1990년 여름, 전국 한의과대학 교수님들과 졸업생 17인으로 구성된, 중국 동서남북 지역을 여행하는 ‘중국 내 본초 및 중의학 현황 탐사팀’이 결성되었다. 요즘에야 인천공항에서 북경까지는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단거리 코스이지만 그 당시의 중국 여행길은 참으로 길고 험난했다. 김포국제공항을 출발, 홍콩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다시 광동성 광주에 도착한 후 다시 북경으로 가는데, 온종일 비행기 속에 있어야만 했다.

드디어 도착한 북경공항, 에스컬레이터가 길게 방향을 잡아주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반대쪽 저편에 대만 타이중에서 함께 살며 도움을 받았던 집주인 부부와 한 동네 어른들이 타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부터 대만과 중국이 상호 여행과 교역의 문을 열었다는 뉴스에 참 부러워했었는데 바로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목적이 있든 화끈하게 실천에 옮기는 중국인들의 기질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주변의 함성과 박수들 속에 달려가 얼싸 끌어안은 채 한바탕의 소동이 북경공항에서 연출되었다.

넓은 거리에 자동차도 거의 안 다니던 그 시절, 북경의 오래된 거리의 중의학 서점, 중의대 및 부속병원, 한방 관련 제약회사 등 여러 곳을 방문하고 관계자들을 만남에 이어 연변, 성도, 광주 등 동서남북 전역을 훑어 내리는 여행을 통해 중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현주소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은 향후의 국제적 정세를 알아감에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금지된 일이지만,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 정복자라도 된 양 태극기 휘날리며 애국가도 부르고, 이 사람 저 사람 껴안고 증명사진도 찍어대던 그 흥분, 그리고 한민족의 얼, 신성함 이상의 강한 느낌을 주었던 천지의 맑은 물을 얼굴에 잔뜩 찍어 바르며 눈물 흘렸던 일들을 다시 추억해 보니 지금도 내 맥박은 더욱 용솟음쳐 오르고 있다.

18박 19일의 험하고도 긴 여행 내내,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힘이 넘치는 장정들은 어디론가 중국의 밤 풍경을 탐방하러 나갔지만, 체력 안배를 위해 스스로 남기로 결정한 한 여교수는 호텔 방에 홀로 앉아 눈물로 결심하며 수첩에 적어놓은 글이 하나 있었다.

“앞으로는! 아니 평생! 남자들 속에 여자 혼자 참석하는 장기 여행에는 절대로 오지 말자!”

© 이혜정 교수의 담 넘어 만난 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