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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여행지를 다시 간다는 일만큼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다녀온 곳을 다시 찾아가게 된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한번 인연을 맺으면 다시 만나게 되는 곳. 15년 만에 다시 간 경주 분황사지가 내게는 그랬다.

자전거로 둘러보는 답사 여행 1번지

근래 책을 쓰느라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2년 동안 시간을 내어 취재하러 다닌 끝에 원고를 쓰기 시작했는데, 며칠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봄꽃 소식이 들려오자 식구들은 우리도 여행이 가고 싶다며 날을 정해 놓았고, 속은 탔지만 그렇다고 원고가 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니 난감할 따름. 기어코 약속한 날이 올 때까지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손을 놓고 떠나는 수밖에. 조만간 담당 편집자의 독촉이 날아오겠지만, 감수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그렇게 떠났다. 아내와 1호는 제주도를 가자며 노래를 불렀지만, 4월 초부터 급격하게 뛰어버린 비행기 푯값을 보고는 탈룰라급 선회를 시전했다. 그 결과 새롭게 정해진 목적지는 경주. 최근 역사 공부에 푹 빠진 1호의 선택이었다. 그 덕에 여행지 선정도, 2박 3일간의 일정도 모두 역사 여행에 맞추어졌다. 15년 만에 경주 분황사를 찾게 된 건 전적으로 1호의 덕이다.

마지막으로 분황사에 갔던 때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일본에서 여행하러 온 친구 둘을 데리고 경주에 갔고, 자전거를 빌려서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길을 이제는 나의 아내와 내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빠와 엄마의 도움 없이 자기들 스스로 자전거를 익힌 두 녀석은 제법 자전거를 잘 탔다. 경주를 여행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자전거는 꽤 권할 만한 방식이다. 경주의 주요 볼거리는 시내를 중심으로 몇 킬로미터 안에 몰려 있는 편이어서 하루 이틀 정도는 자전거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건 자전거 여행을 즐기기에 도로 사정이 썩 좋지는 않다는 점. 자전거 전용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안전하게 타고 다니도록 방편이 준비돼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건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자전거 여행을 하려니 그 점이 더욱 신경 쓰였다. 물론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저 녀석들은 안장에 앉자마자 쌩하니 앞으로 달려가 버렸지만.

그래도 안전에 관한 교육은 잘해 왔던지라 큰 문제 없이 목적지를 다닐 수 있었다. 시내의 대릉원에서 분황사지까지는 2.5킬로미터 남짓. 그리 부담되는 거리는 아니다. 복작거리는 도로를 벗어나면 곧장 이어지는 교외의 풍경.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옛 유적지를 지나면 황룡사지 저편 너머로 분황사가 나온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 (634년)에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예전 수학여행을 가면 모전석탑만 잠깐 보고 돌아오는 필수 코스이기도 했던 곳. 누구나 한 번쯤은 가 봤을 그 절이다. 문제는 분황사에 대한 기억이 여기에서 멈춰있다는 거다. 이외에는 누구든 분황사에 관한 정보가 지극히 적다. 이 절이 소성거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더더욱 아는 이가 드물다. 그나마 절 안팎에 세워둔 안내판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알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스스로 파계한 소성거사의 절

아마 소성거사가 누구인지부터 궁금한 사람이 많을 거다. 당연하다. 역사를 전공한 이가 아니고서는 그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으니까. 하물며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한 이래 단 한 번도 역사 시험에 출제된 적도 없는 이름이니까. 소성거사는 원효 스님이다. 흔히 원효대사라 말하는 그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효 스님은 두 번에 걸쳐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 했다. 두 번 모두 동행했던 이가 신라불교의 두 거목 중 하나인 의상 스님이다.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 땅을 통과하던 중에 간첩 혐의를 받고 투옥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혈기방장했던 두 스님은 그 고초를 겪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백제에서 배를 타고 중국에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몇 날 며칠을 걸어가던 중 하루는 토굴에서 잠을 청한다. 여기서부터는 모두가 아는 그 스토리다. 간밤에 마신 해골물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원효 스님의 이야기.

여기서 두 사람의 행로가 바뀐다. 의상 스님은 기어이 중국으로 가 학승으로 명망을 얻었고, 귀국 이후 수준 높은 불교의 법도를 전한다. 반면 원효 스님은 사람 마음의 간사함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한다. 이후 스스로 파계하고 미친 사람의 행세를 하거나 거지꼴을 한 채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때 쓰던 이름이 소성거사다. 스님의 이런 기행은 뭇사람의 흥밋거리가 되었다. 따라 부르고 함께 춤을 추다 가랑비에 옷 젖듯 원효 스님이 전하고자 한 세상의 이치가 온 사방에 퍼진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화엄경>의 가르침. 이 간단하지만 알고 보면 심오하기 짝이 없는 그 진리를 원효 스님은 그리도 쉽게 세상에 퍼뜨린다. 정작 유학을 다녀온 의상 스님보다 비유학파로 남은 원효 스님의 이름이 더 드높아진 이유다.

원효 스님은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세납으로 입적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그의 아들 설총이 원효 스님의 유해로 소상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소상이란 흙과 같은 것으로 빚은 형상을 뜻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유해로 일종의 상을 빚어 분황사에 모셨다는 말이다. 설총은 분황사에서 항상 마음을 다해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서 돌아다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 설화 때문인지 이 소상이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모양인데, 훗날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에도 분황사에 이 소상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분황사는 여러모로 독특한 면을 가진 사찰이었다. 지금까지 그 모습을 전하고 있는 모전석탑의 모양새도 그렇지만, 절의 가람배치도 그렇다. 보통의 사찰은 대웅전이나 보광전 같은 주불을 모신 전각을 꼭짓점으로 해서 각각의 전각이 늘어서듯 배치되지만,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품(品) 자형 일탑삼금당식 가람이었다. 그러니까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배치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분황사 내부에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절을 돌아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찰의 양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자못 신비롭게 느껴진다.

분황사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당시 처음 봤을 때는 뚱하게 스쳐 지났고, 그 뒤로 몇 번을 다시 다녀가면서 조금씩 그 독특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내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고 나서야 그 사찰의 진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알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녀갔던 여행지여도 다시 간다는 게 소모적인 일만은 아닌 셈이다.

경주의 아침은 언제나 콩국

경주에 오면 꼭 들렀다 가는 집이 있다. 대릉원 바로 곁에 있는 ‘경주원조콩국’이라는 식당이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보면 꽤 유서 깊은 콩국 전문점을 만나게 되는데, 목포의 ‘유달산콩물’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콩으로 만든 콩물 혹은 콩국은 예전 주전부리나 먹거리가 흔치 않던 시절에 꽤 각광받았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몇 곳 남지 않았지만, 다행히 남아있는 곳은 지역을 대표하는 식당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흔하다.

보통 콩물이나 콩국이라고 하면 일종의 두유를 생각하면 쉽다. 그러니까 콩을 삶아서 내린 걸 먹는 거다. 편의점에만 가도 베지밀 같은 두유가 흔한 세상에 공들여 내린 콩물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싶지만, 먹어보면 역시 다르다는 걸 느낀다. 심지어 경주의 콩국은 전국 어디를 가나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다. 이 가게에서 내놓는 메뉴는 무얼 골라도 후회가 없다. 대표적인 것이 생우거지콩국과 따뜻한 콩국 시리즈다.

이 집에서 가장 먼저 먹어봐야 할 것은 따뜻한 콩국. 종류가 세 가지다. 1번은 검은깨, 검은콩, 꿀, 찹쌀도넛이 들어간다. 2번은 들깨에 달걀 노른자, 흑설탕을 뿌린 후에 참기름을 두른 것. 3번은 찹쌀도넛, 들깨, 달걀 노른자, 흑설탕으로 구성했다. 무엇을 골라도 만족도가 무척 높다. 꿀이나 흑설탕이 들어가 달달한 맛이 돌고 깨나 콩이 가미돼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경주를 여행하려는 이에게 아침 식사로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먹고 나면 부담이 없고 속이 편하다.

점심이나 저녁으로 이곳을 찾았다면 생우거지콩국이 좋겠다. 잘 갈아낸 콩국에 생우거지를 넣어서 끓여 낸다. 비린 맛이 하나도 없어서 아이들도 잘 먹는다. 구수한 향과 맛이 잘 어우러지고 생우거지의 아삭한 식감이 입안을 즐겁게 한다. 여름에는 콩국수를 찾는 이도 많다.

이 식당의 가장 큰 덕목은 아침 5시부터 문을 연다는 점.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이른 아침 콩국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고 길을 떠나도 좋겠다. 경주를 방문하면 한 번은 꼭 들렀다 오는 집. 나에게는 이 가게가 첫손에 꼽는 음식점이다.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입안으로 콩국의 은은한 향이 도는 듯한 기분이다. 경주 여행을 함께한 가족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하니 더없이 좋았다. 그 맛을 더 많은 이가 알아주었으면. 아마도 경주 여행은 콩국의 고소함으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20세기 이후 가장 각광받는 작물이라면 역시 콩을 빼놓을 수 없다. 생산량도 엄청나게 늘었고 찾는 이가 갈수록 많아진다. 세계 최고의 신데렐라 작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콩에 들어있는 단백질은 농작물 중에서도 최고다. 비타민 B가 많고 A와 D도 풍부하다. 상대적으로 비타민 C는 거의 없지만, 콩나물로 키우면 성분 변화로 비타민 C도 확 늘어난다. 식이섬유, 무기질도 많아서 장수식품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