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넘어 만난 한의학

일찍이 지방의 여고를 졸업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서울 유학 생활을 시작한 이후, 멋지고 훌륭한 한의사가 되겠다며 인생의 한 폭 그림을 다부지게 그려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나름 국제적 감각을 익힌다며, 과 동기들과 함께 회기동 63번 버스로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눈물로 그들을 포옹하는 가족 친지들의 모습을 보며, 미래 한의학을 향한 어떤 마음을 다지며 돌아오곤 했었다.
좁은 울안에서 대롱으로 보던 세상을 넘어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새가 되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꿈은 내 인생 최고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그 단편 단편들에서 만났던 한의학 언저리 평생의 인연들은 아름다운 구슬로 엮어져, 오늘날 나의 삶에 든든한 지침돌이 되어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퇴직한 여교수의 한의학 인생 에피소드 몇 대목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학력]
1980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한의학사)
1982 대만중국의약대학 대학원 졸업 (중의학석사)
1986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과 졸업 (한의학박사)

[경력]
1987-2020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2005-2014 과학기술부 우수연구센터(SRC)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 소장
2014-2017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2006-현재 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2008-현재 대만중국의약대학 객원교수
2020-현재 경희대학교 고황명예교수(정년연장)

[저서]
<흐름의 철학 경락> 및 침구경락경혈학 관련 서적 다수

이혜정
이혜정

1980년 경희대학교 졸업 직후, 한의계 최초로 해외 유학을 시도하였고, 귀국 후 모교 교수로 30여 년간 연구와 강의에 종사하였음. 과기부 우수연구센터(SRC)인 침구경락과학연구센터 소장 및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면서 경희대학교 고황명예교수로 근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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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미래 의료, 소통과 보살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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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계 최초의 연구정보센터, 한의약융합연구정보센터 (KMCRIC). 본 센터의 ‘생활 속 한의’에 칼럼을 연재하는 동안 일 년이라는 시간이 꿈처럼, 또한 쏜살같이 지나갔다. 긴 역사 속에 면면히 흘러온 ‘한의 진료실’의 범주를 벗어나, 또 다른 바깥 풍경이 궁금해 담 넘어 튀어보았던 삶의 여정을 듬성듬성 펼쳐 보이며, 마치 추억의 시간 여행을 하는 듯 재미도 있었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 시절부터, 변화, 개혁, 국제화라는 말들이 주변을 맴돌 때마다, 어느 과학자가 말한 문장 하나는 언제나 내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과학은 인간과 대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였고 진리의 탐색이었다. 가장 숭고한 형태의 과학은 신비한 차원의 영적 노력이고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 자신과 서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협동과 의사소통의 가치를 보듬어 안는다.”


인간 세포에서부터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한의학과 함께, 바야흐로 이제는 소통과 공감의 가치를 끌어안을 보다 많은 우주적 사색을 하고 싶어진다.


2013년에 개최된 ‘21세기 순천만 국제정원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라남도 순천을 여행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정원, 파형 물정원 등 많은 정원을 디자인했던 영국의 찰스 젱스 (Charles Jencks)의 ‘Garden of Cosmic speculation’이라는 작은 언덕 정원 (현재는 봉화 언덕이라 부름)이었다.


놀라운 일은, 본 정원은 ‘인간 존재의 마음과 우주는 상통한다’는 동양적 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나선형의 오름길을 만들어 우주와 존재에 대한 사색을 끌어내어 거기에서 생명 창조의 영감을 얻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어우러지는 빛과 선을 관찰하며, 우주적 은유의 한 형태인 자연의 파동을 근간으로 삶의 기본 형태를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나선형의 이 길을 걸어 올라가며 ‘나는 누구인가? 나와 우주는 어디로 가고 있나?’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참으로 철학적인 공간 연출이었다.


중국 원나라에서 기원했다는 ‘차경 접근법’이라는 것도 보면, 우주와 같은 머나먼 풍경을 인간 존재와 같이 가깝고도 작은 풍경으로 이입 변화시키면서, 존재와 생명을 이해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하는, 이른바 과학적 대화와 설명과 은유와 확산적 세계관이 깃들인 하나의 명상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파동과 빛을 바라보는 명상의 한 방법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동시에 대우주 소우주 간의 순환, 공명을 통해 인간의 삶을 조명하며 건강과 질병의 원리를 탐구하고 치료의 방법과 삶의 방식도 함께 터득해나가는 한의학의 세계관도 여기에 함께 오버랩 되는 느낌이다.


10년 전부터 지금껏 우리 연구실을 자주 방문하여 세미나 강좌를 열어왔던 그리스계 미국인 물리학자 미나스 카파토스 박사 (미국 채프만 대학 교수)는 오랫동안 체득해온 과학적 지식과 동서양의 철학을 융합시키는 가운데 언제나 마음을 얘기하고 시간을 정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탐구한다. 별들의 속삭임과 파도의 재잘거림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생생한 존재감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우리 앞에 있음을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한다.


또한 그는 새로운 양자 과학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면서 우주에 적용되는 세 가지 자연법칙을 말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제공하는 통합적 양극성의 법칙, ‘여기에서 그런대로 저기에서도 그러하다’는 회귀 또는 보편성의 법칙, 그리고 우주의 모든 생명 존재는 다른 뭔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흐름의 창조 법칙이다. 이들 법칙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과 느낌에 직면한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모든 존재는 흘러간다’라며 마음이나 영혼과 물질세계 사이엔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듯이, 입자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이 실제로는 마음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이다.


일찍이 동양에서도 만물은 정지 상태에 있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항상 운동하고 변화하고 흐르는 가운데 에너지와 생명을 지속시켜왔음을 간파하였으니, 그러한 역동적인 흐름의 본성이 유기체인 우리 몸으로 들어와 음양오행으로 표현되는 한의학적 생명 담론, 장부경락 이론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갇혀있고 닫혀있기보다는 통합적이고 창조적인 흐름이 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시간과 마음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더 높은 지혜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는 카파토스 박사의 결론에 다다르니, 어느덧 우리의 몸과 마음이 대화하고, 몸의 지혜가 소통되고 공명하는 경지에 이른 듯 가벼워진다.


일찍이 몸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인지해왔다. 경희대 미래문명원에서 만났던, post-Actor-Network Theory (ANT) 이론가, Annemarie Mol 교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 문화인류학과)도 사회 속의 다양한 인간관계와 역사적·사회적·기술적 변화 모델 등의 현실이 환자, 의사, 치료 기술 및 치료 개념 등의 의학적 행동 네트워크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당시 토론회에서 강조하고 있었다.


그녀의 저서인 『The Logic of Care』의 “관리 대 치료 (managing vs doctoring)“ 내용에, 실제 의료 행위에서 어떻게 관리와 치료가 일어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치료 행위의 대안을 고민해 보자는 내용이 있다. 즉, 경영이나 의학 모두 이제는 구체적 관리와 보살핌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특히 서양의학의 선택·통제의 논리와 동양의학의 돌봄·유연성의 논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전 세계에 공유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Mol 교수의 생각에 공감을 표하며, ‘서양의학이 과학적 지식의 바탕 위에서 기계론적 진단으로 병의 원인을 찾아가는 선택과 통제의 논리 위에 서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의학은 오직 치료만이 아닌 조화와 균형의 섭생, 흐름, 소통을 매개로 하면서 몸의 원리와 보살핌의 논리를 바탕으로 삼아 발전해 왔음에 주목해야 한다.’의 내용으로 토론에 답하였다.


의사소통 가족치료 전문가인 그레고리 베이슨이 지적한 대로, 정보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차이를 만드는 차이”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인체의 고유한 능력을 결정하는 정보는 물질과 에너지의 한계를 넘어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화 발전되어 온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한의학을 설명하는 진단과 치료의 기본 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편, 환자의 삶을 조정하는 것이 질병이라고 인식하여 환자 몸속 병의 원인을 찾아 질병과 관련된 개인의 내력, 즉 병력에만 치중해왔던 서양의학이 최근 변화의 한 축을 긋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신경학적 바탕에 면역학적 연계성이 세워지고 정신적 영역이 가미되면서, 치료 환경의 중요성, 각 분야 팀워크의 중요성, 삶과 질병의 이해, 의학의 가치, 치료와 관리 차원의 개념들이 새로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의사들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의 개발, 환자와의 교감을 위한 대화도 중요시되고 있다. 환자의 질병을 다룸에도 이해와 정보를 통한 타깃 value를 우선으로 설정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더불어 임상 역학조사 분야의 확장 개발도 함께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거대 지식의 축적과 테크닉의 고도화가 가치 개발과 관리 및 이해의 차원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며, 여기에 공감, 공명,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개입되는 순간이며, 가로와 세로의 직물 관계로 형성된 통제와 보살핌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새로운 치료 패러다임이 강하게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에서 이제 한의약 분야에도 변화의 바람이 요구되고 있다. 국민들은 효과가 좋고, 믿을 수 있는 치료를 원하고, 관련 기업들은 바로 산업화로 진행될 수 있는 기술 이전을 원하며, 한의 임상 현장에서는 의료 서비스 시장이 보다 더 활성화되길 원하고 있다. 따라서 환자 중심, 서비스 중심, 보살핌 중심의 의료모델 구축 및 연구개발이 중요한 반면, 사회 저변의 삶과 건강에 대한 인식 또한 의료의 변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이전의 연구개발이 기술 자체의 중요성, 가치, 잠재적 파급효과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장이나 사회 혹은 국가적 수요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가느다란 기억의 통로를 더듬어 필자가 직접 경험하고 걸어온 국내외 한의학 특히 침 연구의 여정을 정리하고 보니, 이 또한 반세기 동안의 세월 속에 함께 한 한의학 연구 역사의 한줄기였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 길에서 이룬 많은 성과는 결코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었고, 여러 한의 생명 분야의 많은 동료와 후학들이 노력하고 쌓아 올린 탑에 내가 대표로 간판을 달았던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발자취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12회에 걸쳐 이어온 이 글들이 청출어람 후학들의 발걸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람과 함께, 그들이 또 다른 역사의 문을 열고 열심히 뚜벅뚜벅 걸어가 주길 간절히 기원하며 본 연재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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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정 교수의 담 넘어 만난 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