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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동쪽으로 물러난다. 거친 파도는 물러나는 동장군을 거칠게 사로잡아 먼바다로 내보낸다. 삼척 추암해변에는 이미 따스한 기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푸른 빛깔의 7번 국도

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방향은 동해안이다. 지도를 놓고 고심하다 삼척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지난해에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자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내려가는 길은 그저 그랬다. 살짝 찌푸린 하늘. 서운하리만큼 날씨는 좋지 못했다. 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삼척까지 가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도로가 조금이라도 정체된다 싶으면 6시간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삼척을 찾는 이유는 관광자원이 활성화되어 있는 강릉 북부와 달리 소박한 강원도의 모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수도권에서 삼척까지 가기에는 강원도 북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찾는 이도 비교적 적다.

삼척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가는 길의 풍광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내달리는 동안 왼편으로 보이는 바다의 시원한 경관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서해, 남해와는 다른 검푸른 빛깔의 동해는 겨울이면 파도가 한층 거칠어진다. 곳곳에 솟아오른 바위를 때리는 파도는 하얀 포말이 되어 부서져 내리는데, 이 모습이 달리는 차 안에서도 보인다. 가끔은 멀리 거리를 두고, 때때로 바다 바로 곁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하며 그렇게 7번 국도는 이어져 있다. 좀처럼 지루할 틈이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원한 겨울 바다를 벗 삼아 드라이브를 즐기는 데는 역시 동해안이 제격이다. 잊을 만하면 태백산맥 너머로 차를 모는 이유다.

삼척에는 누구나 한번은 보았을 법한 명소가 있다. 삼척 바닷가의 명물 추암해변이다. 추암해변의 촛대바위는 애국가의 배경으로 아주 유명하다. 촛대바위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누구나 “아!”라고 할 만한 곳이다. 누구나 한번 가 봐야지 하지만 좀처럼 마음을 내서 다녀오기에는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여행지다. 그 탓에 생각보다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다닐 여행지로 삼척을 선택한 김에 이번에는 꼭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삼척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마치 도착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역시 날씨가 좋으면 여행하는 마음도 한결 밝아지기 마련이다. 동해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난 덕분일까. 과거에 비하면 삼척을 찾는 이도 꽤 늘어났다. 눈에 띄게 여행자가 많다. 추암해변 일대도 몇 년 전에 비하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이루어졌다.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기수역 주변도 아주 깔끔해졌다. 다리 아래에선 청둥오리 떼가 노닌다. 아마도 이곳에 둥지를 튼 녀석들이 아닌가 싶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가로 가는 길목에는 해암정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지어진 정자다. 삼척 심 씨의 시조인 심등로가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와서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해암정은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중종 당시에 복원한 것이다. 몇백 년의 시간이 해암정 곳곳에 묻어 있다. 이곳을 차지하고 앉아 이 경치를 만끽했을 심등로가 내심 부러워진다.

파도가 만든 국내 유일의 라피에

이 위치에 정자를 올린 마음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불과 5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고, 그 앞과 곁을 바위들이 막고 섰다. 어지간하게 높은 파도가 쳐도 바위가 막아줄 법하다. 경치는 경치대로 챙기고 안전은 안전대로 확보한 선택이다. 이 일대에는 ‘능파대’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하천과 파랑이 싣고 온 모래가 쌓인 육지, 그와 연결된 육계도, 해안을 막고 선 기암절벽 일대를 모두 통칭한다. 사실 국내에는 이런 풍경을 가진 바닷가가 드물다.

특히 암석지대의 경우 삼척이기에 존재할 수 있는 지형이다. 삼척은 석회질이 아주 풍부한 땅이다. 강릉 아래에서 울진에 이르는 지역에 시멘트 공장이 많은 것도 이런 특징에서 기인한다. 삼척이 동굴로 유명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다량의 석회암은 지하수를 만나 녹아내리며 용식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현상이 땅 밑에서 일어나면 동굴이 만들어지고 지표에서 이루어지면 능파대 일대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런 지형을 두고 ‘라피에’라고 부른다. 특히 이곳의 라피에가 특별한 것은 지하수가 아닌 파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국내에서 추암해변이 유일하다.

석회질이 매우 많은 중국의 경우 이런 라피에가 많은 편이다. 특히 서남부에 집중돼 있고, 이런 지형이 베트남까지 이어진다. 지하수와 석회암이 만나 삐죽삐죽 솟아오른 암석지대를 두고 중국에서는 ‘석림’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능파대의 암석지대를 ‘한국의 석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 보았던 석림과 많이 닮았다.

해암정 뒤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면 이 암벽지대로 들어가는 계단과 연결된다. 차근차근 발을 내디뎌 해안절벽 사이로 들어간다. 멀리서 몰려오는 파도가 제법 높다. 이 암벽이 아니었다면 저 파도가 이 안쪽까지 몰려들었을 듯하다. 다소 좁은 길이지만 지형을 따라 늘어서 있어 천천히 주변을 감상하며 걷기 좋다. 바위 너머 파도 소리는 청량하고 쏟아지는 햇살도 따스하다. 어느새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다가왔음이 느껴진다.

걸어야 하는 구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주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촛대바위가 있는 정상부까지 다다를 수 있다. 석회질 암반 저편 바다 가운데에서 촛대바위가 우뚝 솟았다. 그 자리에 서서 보니 애국가 영상이 왜 이 모습으로 시작하는지 알 것 같다. 전망대의 방향이 촛대바위를 걸쳐 정확히 해가 뜨는 지점에 맞추어져 있다.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리인 듯싶다.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의 신비에 감탄을 참기 어렵다. 자연은 무심하게 만든 것이 인간에게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다가온다.

풍성한 상차림에 커지는 만족감

추암해변 바로 근처에 쏠비치 리조트가 있다. 이 리조트를 지나 조금만 더 내려가면 해안가를 낀 식당가가 나온다. 식사는 이쪽에서 하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평가가 좋은 식당을 찾아봤다. 대여섯 곳의 식당 이름이 나온다. 그중 시설과 음식의 질 측면에서 가장 평이 좋은 ‘일미담’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번 여정은 가족과 함께하는 터라 아이들의 입맛도 고려해야 했다. 무엇보다 돌솥밥을 제공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집밥이 아닌 식당 밥을 먹을수록 밥의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더불어 역시 한국인의 밥상에서 주인공은 밥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래서 돌솥밥을 하는 식당을 만나면 자꾸만 시선을 빼앗긴다.

일미담의 메뉴는 돌솥밥을 중심으로 한 한정식에 가깝다. 간장모듬장 정식이 제일 비싸고 그 아래로 돌솥 특정식, 돌솥 A정식, 돌솥 B정식, 돌솥 C정식 등으로 구성돼 있다. C정식이 가장 저렴한데 일품요리로 돼지불고기구이가 제공된다. 여기서 하나씩 위로 올라갈수록 고등어구이, 소불고기전골이 하나씩 추가된다. 아이들과 상의한 끝에 B정식으로 결정했다. 기본 찬부터 상 위에 깔리는데, 아주 정갈한 모양새다. 하나하나 맛도 훌륭하다. 한정식을 그리 선호하지 않지만, 이렇게 모든 찬에 정성이 느껴지는 곳은 마다하지 않는다.

고등어구이와 돼지불고기구이까지 모두 깔리니 다른 찬을 둘 곳이 마땅치 않을 만큼 상이 그득하다. 이럴 때는 얼른 반찬을 줄여나가는 게 방법이다. 고슬고슬하게 지어낸 밥도 훌륭하다. 고등어구이와 돼지불고기를 한꺼번에 먹는 즐거움이란. 돼지불고기는 석쇠에 구운 듯 물기가 없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간도 적당하다. 밥이 맛있고 음식 솜씨가 좋으니 돌솥밥이라 추가로 주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무척 아쉬워진다.

등 푸른 생선인 고등어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다. 이는 뇌 기능 증진에 도움을 준다. 기억력 향상, 우울증, 치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ADHA)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액 응고 방지 역할로 뇌졸중이나 관상동맥 질환 예방에 탁월한 면모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은 혈액을 과도하게 희석하여, 되려 뇌졸중의 위험을 높일 수 있으니 금물이다. 이외에도 고등어에는 혈관 확장, 혈소판 응집 억제, 혈압 강하, 혈중 중성지방 저하 등의 작용을 하는 EPA, 두뇌 건강 및 치매 예방에 좋은 DHA 등도 많이 함유되어 있다. 고지방, 고열량 음식 섭취가 많고 해산물을 적게 먹는 현대인에게 권장할 만한 생선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