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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가 다시 피어나고 있다. 봄보다 먼저 피어나는 남도의 동백처럼, 그렇게 오래전 골목에서부터 목포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유달산 기슭의 해안가 마을

요즘 목포에서 가장 핫한 곳이라고 했다. 목포에 사는 지인은 꼭 들렀다가 가라며 보리마당을 추천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열고 찾아보니 목포항에서 멀지 않다. 시간을 내어 잠시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인 위치다. 평일 오전의 목포를 슬슬 가로질러 보리마당을 찾아 떠났다. 마침 포근한 바람이 불어 좋은 날이었다.

보리마당은 바다를 곁에 둔 유달산 기슭에 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다더니 조그마한 마을 주차장도 마련돼 있다. 목포 하면 유달산이다. 산세가 그림처럼 아름다워 목포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산이 그리 큰 편도 아니다. 차를 몰아 돌아보면 30분 남짓이면 충분할 정도. 서남쪽 바다 바로 앞이 이른바 보리마당이라는 마을인데, 전형적인 바닷가마을이다. 차에서 내려서 올려다보는데 부산의 감천마을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아담하고 경사도 그리 급격하지 않다.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경관은 둘이 똑 닮았다.

슬슬 걸어서 마을을 향해 올랐다. MZ세대가 데이트코스로 선호한다더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네가 겪어보지 않은 동네 풍경이겠지만, 아마도 외할머니집이 주는 푸근함 같은 정서를 이곳에서 찾는 게 아닐까. 마을 초입의 가게들도 호사스럽고 그럴듯한 먹거리보다는 값싸고 양 많은 옛날 동네 슈퍼 같은 느낌이다.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풍족할 리 없다. 사진을 찍는 사이 곁을 스쳐 지나가는 20대의 두 친구는 각자 손에 김밥을 싸 들고 보리마당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을 저 위쪽을 보니 벤치 몇 개가 보인다. 저기에 앉아 바다와 마을이 자아내는 감성을 즐기며 점심을 해결하려는 거구나. 큰돈 들이지 않고 즐기는 여행으로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다.

골목 안쪽을 향해 들어서려니 경사가 꽤 가파르게 솟아오른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울컥 치밀 정도는 아니다. 천천히 올라가면 충분히 다닐 만한 수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작은 집들은 1970~8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꼬마 아이에게는 저 대문이 크게 보이겠지만, 훌쩍 커버린 나에게는 집안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일 만큼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그게 외할머니집의 정서가 아닐까. 이맘때쯤 외할머니는 마당에 건 나일론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점심 준비를 하겠지.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다 보면 밥 먹으러 오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아련함이 가득 밀려온다. 내가 자라던 동네는 바닷가가 아니었지만, 이런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자꾸만 그 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 괜히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애잔함에 휩싸인다.

이런 마을은 골목이 미로처럼 복잡하다. 이쪽저쪽 사방으로 길이 뚫려있다. 술래잡기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우리 부모님이 이런 곳에 사셨다면 나는 내 딸들과 이 골목 사이를 누비며 놀았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잠시 그런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 복잡한 골목은 이 마을을 둘러보는 둘레길이 되어 있었다. 목포의 예술가들이 이 마을의 벽에 벽화를 그리고 시를 써서 마을을 예쁘게 꾸며둔 것도 좋았다. 세련됨은 떨어져도 마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시구가 시선을 빼앗는다.

골목 한쪽에 손으로 그린 듯한 지도가 걸려 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골목에 대한 정보도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곳의 이름이 서산동이었구나.’ 예전에는 이곳이 시화골목이라고 불렸다는 것도 그 지도를 보고 알게 됐다. 전형적인 목포 어촌 마을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이 인문 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정비했다는 내용도 보였다.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시인, 화가,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모양이었다.

보리 없는 보리마당

그런 노력의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셈이었다. 옛 시간을 간직한 어촌에 덧칠한 그림과 글씨가 사진을 찍을 스폿이 됐고, 수많은 젊은 층의 발길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 많은 이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이 마을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이 없었다면 여행자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바닷가 마을의 절정을 보여주는 곳은 마을 위에 있었다. 초입에서 보았던 벤치가 있는 그 자리. 그곳에 오르니 비로소 목포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늘 평화로울 것만 같은 고요함.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은 훈풍.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리든 눈에 다가와 맺히는 풍경이 너무나 좋았다.

그 위쪽으로는 데크를 놓아서 산책로를 만드는 중인 듯했다. 아마도 완성단계인 것처럼 보이는데 아직은 금줄을 쳐서 진입을 막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서 그 위로 올라가는 진입로를 찾았다. 이곳의 이름이 보리마당인 이유를 보고 싶어서였다. 만약 저 위에 보리밭이 있다면, 미처 싹의 틔우지는 않았어도 이곳이 보리마당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꽤 걸어 올라간 그곳에 보리밭은 없었다. 아마도 포도밭이 아닐까 싶은 곳만 보였다. 그래도 그곳까지 올라가니 조금 전 벤치에 앉아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 이 모습만 보아도 아주 좋다.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온 보람이 있구나. 찍을 것이 많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때로는 기를 쓰고 사진을 찍어 남기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그런 여행지가 있다. 이곳이 그런 곳이었다.

내려갈 때는 올 때 보았던 골목이 아닌 다른 골목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런 오래된 마을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같은 시선에서 담기는 모습도 서로 다르게 다가온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가운데 골목에서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 물씬 밀려왔다. 오래된 시멘트 길을 따라 걷는 중에 벽에 적힌 시가 발길을 붙잡았다. 

다라로 쥐고기 가득이고 댕기믄서

자식들 키웠제.

아들 둘 딸 셋 대학교, 대학원까지

보냈제.

아들들이 용돈 보내줘

밥도 먹고 병원도 당기네.

딸들은 명절 때 제사 때

돈도 보내주고 두유도 보내준게

좋제.

자식들이 다 잘해준게

제일 행복…

사실 제일 마지막 부분은 글씨가 많이 상해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자식들 어렵게 키웠더니 잘해 줘서 참 좋다.’라는 그런 뜻이겠지. 이 시의 제목이 ‘자식자랑’이다. 이 어촌마을에서 쥐고기 (아마도 쥐치)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 벽에 적힌 시를 읽고는 괜히 마음 뻐근해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눈에 보이는 그 풍경을 주워 담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 아래로 내려오니 커피가 무척 마시고 싶어졌다. 마침 카페 하나가 보였다. 작은 카페는 단정했고, 그 안에서 커다란 창가 테이블에 어떤 여인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다른 카페가 있었어도 이 집에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하필 그 일대에 카페는 그곳 하나였다. 망설일 필요 없지 않나. 들어가서 카푸치노 하나를 시켰다. 이런 날엔 보들보들한 우유 거품과 향긋한 시나몬 가루가 어울린다.

사장님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듯 악기 몇 가지가 카페 이곳저곳에 보였다. 음악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자리가 원래 당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전파사 자리였단다. 음악을 좋아해서 가끔 악기를 연주하곤 하는데, 전파사에 있던 물건들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해서 카페에 두고 싶어도 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장님에게 물었다. 보리밭도 없는데 왜 이곳이 보리마당이냐고.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예전에는 마을 저 위의 벤치가 있는 자리에서 보리를 팼단다. 한때는 그 일대에 보리밭도 있었다고 하는데, 언젠가부터 사라졌다고 했다. 그제야 이곳에 붙은 이름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라진 옛 모습은 이름에 담겨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던 것이었다. 카푸치노를 들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고소함의 극치를 담은 콩국수

목포는 식도락의 천국이기도 하다. 갈 때마다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지난번에 먹었던 것도 다시 먹고 싶고,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도 찾아 먹고 싶어진다. 다른 지역보다도 목포하면 떠오르게 되는 게 몇 가지 있다. 잠깐만 생각을 해 봐도 중깐, 꽃게무침, 병어찜, 준치회무침 등등 끝도 없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유달콩물을 찾기로 했다. 콩물은 콩국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원래 중국에서 온 화교의 음식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아침 식사로 콩국을 즐겨 먹는다.

목포의 유달콩물은 워낙 유명한 집이다. 목포 사람들은 원래 콩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물 대신 마실 만큼 콩물을 많이 먹는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유달콩물은 목포를 대표하는 노포이기도 하다. 1975년에 개업해 얼추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쌓아왔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고, 맛있다. 이곳의 특징은 국산 콩을 고집한다는 점이다. 요즘 국산 콩으로만 콩국을 만드는 가게는 거의 없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콩의 단가가 너무 싼 데다 국산 콩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지 않아서다. 그만큼 단가가 높고 마진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가게 주인들도 중국 콩과 국산 콩의 차이를 손님이 잘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이 집을 다녀오면 그런 생각이 단번에 바뀐다.

주문은 콩국수를 넣었다. 아직은 겨울의 기운이 남아 있지만, 이곳의 콩국수를 무척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워낙 국수를 좋아해서 이 집의 콩국에 말아 나오는 콩국수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두 분이 주문을 받고 면을 삶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은 조금 걸린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앉아 있으면 이내 콩국수가 내 앞으로 놓이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자태부터 살펴봤다. 뽀얀 콩국의 묻혀 하얀 면발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양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만만하게 보아서는 큰코다친다. 양이 꽤 많다.

콩국부터 입에 머금었다. 고소함의 극치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듯하다. 보통 차가운 것보다는 따뜻한 국물에서 더 고소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여기는 차가운 국물을 마셔도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심지어 간도 좋다. 별달리 소금이나 설탕을 넣지 않아도 국물이 간간하다. 하지만 목포에서는 역시 설탕. 개인적으로는 콩물 본연의 맛을 충분히 즐기다가 설탕을 살짝 뿌리는 편을 선호한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짓이다. 이건 콩국 자체의 맛이 워낙 좋고 고소한 맛이 강해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콩국에 말아서 나온 면발도 쫄깃함의 극치다. 삶은 면을 찬물에 충분히 씻어 찬 콩물에 말아주니 면발의 조직이 응축하면서 쫄깃한 식감이 살아난다. 유달콩물의 콩국수는 먹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곁들여 먹는 김치까지 완벽하다. 남도의 음식, 더구나 음식 맛있기로 유명한 목포의 김치인데 두말하면 잔소리다. 아침 식사로 선택한 것이었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 식당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 굳이 노포를 찾는 가장 큰 이유다.

단백질이 풍부하기로 콩을 따라갈 식물이 또 있을까? 단백질의 양만 놓고 따지자면 고기보다는 덜하지만, 흡수율까지 고려하면 고기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불어 섬유질, 비타민,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성장기 청소년에게는 필수다.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해 주기도 하고 철, 칼슘, 인, 마그네슘, 요오드, 칼륨 등이 많아 영양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식품이다. 포만감을 주는 식재료여서 다이어트를 원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