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항해 일지

현재 대한민국에는 5척의 병원선 (인천531호, 충남501호, 경남511호, 전남511호, 전남512호)이 의료시설이 취약한 섬을 돌며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작은 섬에는 병원은 물론이고 보건소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섬 주민분들은 기본적인 감기약 처방은 물론, 한의과 및 치과 치료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찾아가는 병원선에 많은 분이 진료를 받으러 오시며 특히 어르신분들께서는 한의 치료를 가장 선호하십니다.

공중보건한의사로 병원선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힘들지 않나'라는 걱정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라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2022년 한의대 졸업 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저의 생생한 기억들과 느낀 점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학력]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이메일]
djm04201@naver.com

박재량
박재량

병원선은 의료시설이 취약한 섬을 순회하며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가 진료를 보는 선박입니다.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병원선 근무자로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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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병원선 온라인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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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병원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5시 30분. 저는 눈을 뜹니다. 하늘이 밝아지기도 전에 준비를 마치고 차갑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출근합니다. 남들이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출근할 때면 삶을 보람차게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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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섭니다.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출근길을 지나 인천 역무선 부두에 도착하면 수많은 배들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늘은 역시 화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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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의 의국


병원선에 승선하신 여러분을 가장 먼저 공보의 방으로 초대하겠습니다. 배에 올라타자마자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조그마한 방이 나옵니다. 이 작은방에는 170cm 후반 성인 남성 키 기준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맞는 길이의 이층 침대가 있습니다 (따라서 180cm가 넘으시는 분들은 안타깝지만 오실 수 없습니다). 저는 2박 3일간 치과 공보의 선생님과 함께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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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공보의 3명이 모두 이 작은방에서 생활하였으나, 현재는 의사 선생님은 진료실에서 지내시고 치과의사와 한의사만이 이 방에서 잠을 잡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온 날 어떻게 이런 곳에서 생활할 수 있을까 걱정하였지만, 아담한 방의 크기와 불을 끄면 모든 빛이 차단되기 때문에 지하 공간은 오히려 아늑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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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으로는 창문이 없다 보니 환기를 시키기 위해서는 방문을 열어 두어야 하고, 실제로 물 안에 있는 지하 (수중?) 방이라 습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제습기를 필수로 켜두고 생활하며, 제습기를 켜지 않은 날에는 벽면에 물이 맺힙니다. 게다가 최근 병원선에 지문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밤 11시에 퇴근 지문을 찍고 자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계단을 올라 출근 지문을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그렇다 보니 병원선에서 2박을 하게 되면 항상 피로가 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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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배에 타면 인터넷도 안 되고 휴대전화도 안 터져서 어떻게 지내냐는 걱정을 하는데 배에도 송수신기가 있어 전화가 잘됩니다. 와이파이 또한 잘 터져서 진료가 끝나면 영화를 보거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화장실


화장실에는 샤워용품과 세면도구가 있어 매일 샤워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 눈치껏 순서를 기다리며 이용해야 하는 점은 불편합니다. 씻을 때 쓰는 물은 출발 전에 탱크에 넉넉히 채워두며 부족할 경우 섬에서 물을 공급받아 채웁니다. 변기 물은 바다 물을 끌어다 쓰며, 이후 배설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모르니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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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


가장 중요한 식사의 경우, 하루 3끼 모두 배에서 해결합니다. 모두가 같이 상을 펴고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다 보니 직원들끼리 사이가 좋으며, 셰프님의 요리 솜씨는 정말 뛰어나 매번 밥을 배 터지도록 먹게 됩니다. (혼자서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모두 하시는 셰프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_ _)>) 매끼 많이 먹고 좁은 배 안에서 갇혀 지내다 보니 살이 찔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병원선을 타기 시작하고 1달 만에 3kg이 쪘는데, 3년 후 저의 모습이 살짝 두렵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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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저희가 식사 재료를 준비합니다. 섬에서 어부들에게 낚시를 배워 물고기를 직접 잡아 오면 셰프님이 요리해 주시며 선원들과 다 같이 나누어 먹습니다. 이 외에도 주민들로부터 게나 오징어를 받은 날이면 싱싱한 해산물로 배를 가득 채우게 됩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을 바로 회로 떠먹을 때면 바다에서 살아도 굶어 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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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드디어 저의 본업을 소개하게 되었네요. 병원선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넓은 공간에서 본업이 이루어집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틔어있지만, 진료 시에는 블라인드를 쳐서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진료합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바로 위에서 소개해 드린 식사 공간입니다. 병원선은 크지 않기 때문에 한방진료실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진료는 비록 침과 적외선 조사기 밖에 없어 제한적인 치료를 하지만 많은 환자분이 만족해하시며 매번 저를 찾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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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가장 많은 환자가 한방과를 찾는 이유로는 ‘한방 파스’가 있습니다. 병원선은 섬 주민을 대상으로 의과, 치과, 한의과 모두 무상 진료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흔한 약국도 없는 섬 어르신들께서는 매번 병원선에 오셔서 각종 상비약을 받아 가시게 됩니다. 몇십 년째 병원선에 단골로 오시는 어르신들은 약 이름도 외우셔서 필요한 약을 스스로 달라고 하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선에서 진료하면서 아무래도 가장 걱정이 되는 점은 ‘어르신들이 저의 진료를 맘에 들어 하실까?’였습니다. 처음 진료를 시작한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방문하시는 분마다 이전 한의사 선생님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셨는데, 그런 말들이 저를 자극하여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였습니다. 현재 공보의 반년 차가 지난 시점에서 대부분 어르신이 통증이 많이 줄었다고 하시며 저에게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방송국의 관심사


여러 매스컴에서도 병원선은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유튜브에 ‘병원선’을 검색하면 인천, 전남, 충남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여럿 있습니다. 저도 병원선에서 근무하기 전 유튜브를 통해 예습해 보았지만, 실제 병원선을 타보니 방송으로 보는 것과는 정말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자극적인 상황만 편집하여 방송을 내보내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힘들다는 이미지만 남게 되었고, 주변 지인들도 저의 직장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안전하고,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공격하면 안 되는 대상이 병원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병원선 두 번째 출항부터 인간극장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변 지인들에게 자랑하면서 보여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병원선에 자주 촬영 연락이 오지만 대부분 거절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접하기 쉽지 않은 기회를 KMCRIC 생활 속 한의 칼럼을 통해 여러분께 공유하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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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병원선 온라인 투어를 마치며 이후 또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 공보의 박재량의 한의사 항해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