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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 이야기

1984년 1월 말 육군 소위로 전역하고서 한 달이 지난 3월부터 대전대 한의학과에서 1기인 본과 1학년 학생들에게 주당 2시간의 <의학영어>를 강의하였다. 영어가 나의 첫 대학 강단을 열었다. 한 학년 40명 정원에 그중 대여섯 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언제 교수 임용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개업하는 것이 답은 아니지만, 4월 초, 구로구 독산 시장 입구 건물 2층에 한의원이 매물로 나와 바로 인수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명색이 원장이지 20대 중반의 새파란 청년인지라, 환자들이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나에게 “원장님, 계시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 후로는 항상 원장과 이름이 새겨진 흰 가운을 입고 지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개업의로서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다. 임상가로서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았고, 보약 먹으러 온 환자들에게 진찰하고 나서 “보약 먹을 필요 없다.”라고 하고, 귀룡탕 지으러 온 엄마들에게는 “약하지도 않은 애한테 뭐 하러 보약을 먹이려 하느냐? 우리 애도 아직 귀룡탕 한 첩 안 먹여 봤다.”고 하면서 돌려보내곤 했다. 그러니 한의원 운영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마음은 오로지 학교로만 가 있었다.

의학영어 강의로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채우석 학과장님이 “내년 봄에 전임강사 발령을 내도록 할 테니, 대학에 들어와 병리학 강의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얼마나 기다렸던 반가운 말씀인가? 2학기가 되자마자 한의원을 다른 한의사에게 양도하고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채 과장님으로부터 후속 언질이 없었다. 심상치 않아 알아보니, 나의 경희대 조교 시절 학생 선동 전력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대전대학교 설립자는 임달규 혜화당한의원 원장님이신데, 그분의 대학 동기인 경희대 구 모 교수님으로부터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해 자문을 받고 계셨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문 교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분이었다. 대전대에서 나의 임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채 과장님에게 “그 친구는 위험인물이라, 들어오면 자네를 쫓아낼 거다.”라는 식으로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 교수님을 세 번 찾아가 이해를 구함으로써 이듬해 간신히 대전대에서 전임강사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첫해 겨울 나는 강의했던 학생들 전원으로부터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았다. 너무나도 고맙고 한편으로는 ‘아, 내가 강의를 잘하긴 잘했구나.’ 하는 자족감에 빠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교수님들도 모두 학생 전원으로부터 카드를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대전대 한의학과 1기 학생들은 소박하고 인간적이었다. 2011년 여름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해 가자마자 그들은 대전 시내 고급 중국음식점에서 성대하게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했었다. 대학 졸업 후 가장 많이 모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들은 나의 첫사랑 제자들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실력 없는 교수라는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교수지만, 그들에게 조교 역할, 선배 역할, 형님 역할, 밤늦게 때로는 두목 역할도 했었다. 첫해에는 가족들이 대전으로 이사하지 않고 나는 학교 연구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내 연구실 바로 아래층이 해부학 실습실이라 시체도 몇 구 있었고, 원래 대전대 자리가 공동묘지 구역인지라 비 오는 날 소복한 처녀 귀신 소문도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동네 이름이 용운동(龍雲洞)이어서인지 과연 이른 새벽 캠퍼스 골짜기를 흐르는 구름은 장관이었다.

병리학과 의학영어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더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한 끝에, 방학 기간을 활용하여 학생들과 의료봉사를 다니기로 했다. 학창 시절, 강원도 인제로, 충청북도 오지로, 경남 거제도로 여기저기 수없이 의료봉사를 다녔었다. 그래서 자원하는 학생들과 처음 같이 간 곳이 경남 산청이었다. 그때는 대진고속도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전에서 하루 종일 걸려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료가 끝나면 운동장에서 축구 한 게임 뛴 다음 모두 수영팬티로 갈아입고 마을 앞 개울로 나가 물놀이를 하였다. 그러고는 저녁 먹고 밤늦게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또 이어 겨울방학에는 영동으로, 금산으로.

같이 다니던 학생들도 의료봉사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교수가 며칠 동안을 자기들과 함께 먹고 자고 뒹굴고 뛰는 데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겠는가? 결국 대학에서도 우리들의 의료봉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본과 4학년 임상실습의 한 과정으로 채택하였다. 본4 학생 전원이 여름 방학 기간에 세 지역으로 나뉘어 4박 5일간 의료 봉사를 마친 다음, 대전 서쪽 구봉산(九峯山)이 보이는 구봉 농장에 다 함께 모여 잔디밭에서 교수님들의 협찬으로 멧돼지 바비큐와 무제한 맥주 제공의 호사를 누리면서 뒤풀이를 했었다.

일과 후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교내 테니스코트에서 다른 과 교수들과 테니스를 쳤다. 당시 대전대에는 서울 소재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내 또래의 실력 있는 젊은 교수들이 많았다. 테니스를 치고 나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2차를 가면 당시 대전의 중심이었던 은행동 술집에서 다들 모였다.

그렇게 각 과 교수들이 만나면 정치에서 철학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다뤄지다가 결국에는 교수 처우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실질적으로 다룰 조직으로서 평교수회가 결성되었다. 대전대에서는 한의학과가 대표 학과이다 보니 내가 결국 평교수회 대의원 의장직을 맡았다. 급여 등 처우 개선을 위한 대학과의 몇 차례 협상에서 성과를 거두어 당시 전국 대학교수 급여 수준 최하위권에서 출발하여 짧은 기간에 중상위권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수 부인들은 남편들이 테니스를 치고 같이 몰려다니는 것을 은근히 권고 장려하기도 했다. 부인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 모두 정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인들끼리 여전히 연락도 하고 지낸다.

한 번은 평교수회를 대표하여 부득이하게 한의과와 부속병원에서 전횡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채우석 부장님에게 평교수회의 입장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둘이 만난 자리에서 채 부장님은 전에 나의 임용을 놓고 제기되었던 우려가 불길하게 떠오르는 것 같다면서 불편해했었다. 그러나 나는 평교수회의 입장과 견해를 설명하고 서로 간의 오해를 풀어 더 불행한 사태로 진화하지 않도록 중재했었다.

한의학 분야에서는 경희대가 역사도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의 교수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한의대에서는 열심히 연구하지 않아도 경희대에서 일군 학술 성과들을 공유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 대학교수들이 오히려 여러모로 삶의 재미와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대전은 지리적으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국내 어디든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3년간의 행복했던 대전대 교수 생활은 막을 내린다. 1기 학생들이 졸업하고, 1988년 새 학기를 준비하는 유성관광호텔에서의 교수연수회 도중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경희대로 빨리 올라오라.” 개강 1주일도 안 남기고, 총장 면담 등 일체 임용 절차 없이 7년 전 쫓겨났던 모교로 복귀하였다. 내가 경희대로 복귀하는 데에는 은사이신 고 문준전 교수님과 김용옥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경희대로 옮겨 가자 적지 않은 대전대 1기 학생들이 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평생 그들과 같이 지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우리들이 더 크게 되어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다짐하였다. 경희대로 올라간 뒤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대전을 찾았었다.

2002년 겨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 와불(臥佛). 故 문준전 교수님, 도올(檮杌) 선생님과 같이

도올과 고려대학원 이야기

1985년 대전대 교수가 되면서 학생들 앞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내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만났다. 고려대 철학과 김용옥 교수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그 책에 <황제내경 黃帝內經>에 관한 글이 있었는데, 나는 한의대 들어온 이래로 그만한 문장과 내용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분은 한의학 전공자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글을 쓰실 수 있었을까? 그분을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평소 가까이 지내던 강명자 교수님 (꽃마을한방병원 설립 원장)과 점심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김 교수님을 잘 안다고 하신다. 수년 전에 남편 황경식 교수님과 김 교수님이 보스턴에 같이 있었다고 한다. “와, 그러면 나 좀 김 교수님께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며칠 후 강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화사한 오월의 주말 오후, 김용옥 교수님을 댁 근처 봉원동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한 검은 머리에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나오셨다. 인사를 마치고서 “제 실력이 미천해서 부끄러웠고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 책을 읽고서 꼭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반색하시면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미국에서 귀국 후 한의대에 편입하려 했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려면 매주 열리는 강독 세미나도 참석해야 하고 더하여 고려대학원에 정식 입학해서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뜻밖의 권유에 내심 당황하였으나 공부하겠다고 하면서 차마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 후로 매주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고려대학원 철학과 입학시험 준비도 병행하였다.

강독 세미나는 김용옥 선생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1985년부터 3년간 정약용(丁若鏞)의 <악서고존 樂書孤存>, <석도화론 石濤畵論> 등 세미나를 통해 국악계의 박범훈, 백대웅, 손진책, 김성녀, 양승희, 문재숙, 김해숙 등 명인들과 만날 수 있었고, 그 후에는 당시 학생이던 심범상, 박경모, 김기왕 교수 등도 같이 참가하였다.

1986년 4월 초, 김용옥 교수님을 초청하여 대전대 한의학과와 부속병원에서 특강을 했었다. 그러고는 우리 집에서 김 교수님 포함하여 학생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유성관광호텔로 모시고 갔는데, 나에게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더니 심각한 얼굴로 “내가 내일 서울 올라가면 나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지금의 현실은 보통 사람의 평범성을 극단으로만 휘몰아 가고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고칠 것을 고쳐야 한다고 말할 수 없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제 더 이상 교단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양심선언을 하셨다. 그리고 사직과 함께 삭발하셨다.

한의학이 철학과 가깝다고는 해도 대학원 입학시험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고려대학원 동양철학 전공의 석사 전형 과목은 영어, 한문, 철학이다.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한문과 철학 과목에서 과락으로 한 번씩 물먹고 나서 1987년 3월 입학에 성공하였다. 그 사이 경희대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김 교수님이 양심선언을 하고 고려대를 사직하신 뒤였다. 김 교수님의 추천으로 그분의 은사 김충렬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대학원 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의학과 철학 교육과정은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대학원 수업 외에도 학부 선수과목으로 4학기에 24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지방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로서 물리적으로 과도한 학습 분량이었지만, 다 필요한 공부라 생각하고 일주일에 월 수 금 토 4일을 고대에서 수강하였다. 석사 1년 차 때는 서울과 대전을 거의 매일 왕복하다시피 하였다. 일 년을 그러고 나니 심신에 무리가 왔다.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는데, 2년 차인 1988년 봄 경희대로 옮겨가면서 다행히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경희대에서는 정장으로 학생들 가르치고 나서 바로 캐주얼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고려대로 가서 학부생들과 선수과목을 들어야 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치르는 중간고사 학기말 고사 시험 문제를 내고, 또 고대에서는 시험을 치렀다. 윤리학을 수강할 때는 담당 교수님께서 영국으로 교환교수로 가시는 바람에 그분 제자가 강의하였다. 내 고등학교 친구였다. 4학기 동안 학부 선수과목 24학점과 대학원 과목을 모두 이수하였다.

다음 학기에 석사 종합시험을 치러야 했으나, 1989년 3월 나는 대만의 중국의약대학 교환교수로 파견되었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