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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이야기

대학 학부를 졸업하면서 경희대학원 석사과정 시험에서 전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2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또 문 교수님의 배려로 전임 조교로 발령도 받았다. 대학 졸업 첫해인 1981년은 그야말로 쾌조의 스타트였고, 그러한 성취에 탄력을 받아 6년 넘는 연애 끝에 여름방학 학생들 성적을 처리하고 초복 날 결혼하였다. 그러나 대학원 1년 차 2학기에 접어들면서 나의 학교생활에 暗雲(암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학과장을 하시던 문 교수님께서 졸업 동문을 중심으로 교내 한의학연구소 설립을 위해 1억 원이 넘는 기금을 조성하셨고, 대학 본부에서도 이를 크게 치하했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일부 한의대 교수들이 한의계 관련 모 출판사 사장을 사주하여 동아일보 사회면에 ‘경희대 한의대 기부금 물의’라는 제목의 제보 기사를 냈다. 결국 내용은 불문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문 교수님은 교수직에서 물러나셨다. 당시 경희한의대 교수들 사이에는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서울고 출신의 문 교수님과 고 李文宰(이문재) 한방병원장님이 사직하셨다.

그러자 한의대 학생회가 “학문 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한 교수님들이 사직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수업 거부, 중간고사 백지 동맹 등 시위를 계속하였다. 두 달 넘어도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교육부 감사가 들어오는 등 대학 당국은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나의 일 년 후배 학생이 학생들의 계속되는 시위를 조종하는 배후 인물로 나를 지목하여 대학 당국에 밀고하였다. 그다음 날 나는 본관으로 불려 가 시말서 한 장 쓰고 바로 조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시말서를 받았던 본관의 심 모 주임은 본 1 때 한의학관으로 당시 ALA 중앙회장이던 나를 찾아와 광화문 회의를 취소하라고 종용했던 바로 그분이다. 그 후로 몇 년간 서로 친하게 지냈었다.

처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2월 중순경 대학 인사위원회에서 조교였던 나는 대학원 제적, 학생 가운데 정면 학생회장과 최병일 훈련부장 제적, 이용태 등 학생회 간부 4명 무기정학, 또 4명 유기정학으로 상신되었다. 문 교수님께서 학교를 나가신 상황에서 조교직에 대해서는 나도 더 이상 미련이 없었으나 대학원 제적이면 앞으로 학자로의 길은 좌절되고 또 학적이 변동되면 바로 현역으로 입대해야 해서 형편상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의대를 4년이나 다닌 학생회 간부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인사위원회가 열리던 날 새벽, 학생회 간부 전원을 데리고 당시 국회 문교위 소속 최창규 의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 종손)의 자택인 양재동 아파트로 찾아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고 나서 “저는 책임지고 처벌받아도 좋지만, 이 학생들은 무슨 죄입니까? 학생으로서 옳은 일을 주장했고 또 행동에 옮겼을 뿐인데, 학생들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고 또 너무 가혹합니다. 부디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그날 오전 열린 인사위원회 (당시 위원장은 이원설 부총장, 후에 한남대학교 총장 역임)에서 나는 대학원 근신, 제적 대상 학생은 무기정학, 무기정학은 유기정학, 유기정학은 근신으로 완화 경감된 처벌을 받고 모두 무사히 진급하였다. 만약 그날 최 의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는 불가능했다.

조교직에서 쫓겨난 나는 석사 2년 차에 거의 백수처럼 지냈다. 지도교수도 바뀌고 마치 아비 없는 자식처럼 학교에서 보는 시선도 편하지 않았다. 문 교수님은 당시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아서 한의학과 대학원 석사 합격생 45명 가운데 20명이 지도 학생으로 지원하였고, 그중에서 나를 포함한 7명이 최종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 교실이 그렇게 파탄 나면서 종합시험을 치르는 3기에는 입학 동기 가운데 나만 혼자 남았다.

종합시험에서 같은 병리학 전공으로 3년 선배 두 분 (그중 한 분은 동아리 ‘二五律(이오율)’을 만들 정도로 학생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가)과 함께 셋이서 전공 시험을 보았다. 공통과목과는 달리 전공과목 시험은 대부분 기출문제나 전해 내려오는 족보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때 전공 시험 출제를 ‘傷寒論(상한론)’ 전공 교수님이 하셨다. 문제를 받아 본 순간, 우리 셋은 한참 동안 천장을 쳐다보면서 눈만 멀뚱멀뚱. 생전 처음 보는 예상 밖의 문제였다. “오행병리와 오운병리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라.” 머리가 하얘지면서 한 십오 분 정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라 겨우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 같이 당시 임시 지도교수이셨던 고 김완희 교수님을 면목동 댁으로 찾아갔다. 두 선배가 그 문제에 대해 한탄 겸 하소연을 하자, 김 교수님도 “야, 뭐 그런 문제가 다 있냐?”라고 하셨다. 그 문제는 나중에 내가 경희대 교수가 되고 나서 종합시험 전공 문제로 종종 출제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그 문제를 풀지 못했으면 나의 석사학위 취득이 늦춰졌고, 그리되면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석사 장교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이미 결혼했고 곧 아기가 태어날 우리 부부로서는 참으로 험한 길을 가야만 했었다. 아찔했던 고비였다. 나는 지금도 그 절박하고 중요한 순간 분명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석사 장교 이야기

석사 2년 차 때 전혀 뜻밖의 석사 장교 제도가 갑자기 생겼다. 병역특례제도의 하나로, 전국의 석사학위 소지자 가운데 1,000명을 영어 성적으로 선발하여 6개월간 장교 훈련을 마친 후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 시키는 특별한 제도이다. 당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아들로 인한 특혜 시비도 있었고, 결국 몇 년간 실시하다가 폐지되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일 년 일찍 국민학교에 들어갔었다. 할아버지께서 친구 손주들이 학교 다니는 것이 부러워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5월경 나를 假入學(가입학) 시키셨다. “100까지 셀 줄 알고 동생 이름도 쓸 줄 아니 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따라가면 그냥 계속 다니고, 아니면 그다음 해에 제 나이로 다시 다니면 된다.”고 하시면서 밀어 넣으신 거였다. 그렇게 학교는 계속 다녔지만, 생일도 10월이라 국민학교 내내 나는 어리바리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석사 장교 시험에 응시하면서 그 옛날에 학교를 일찍 입학시키셨던 할아버지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장손의 앞길을 위해, 이때를 위해 일찍이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 믿는다.

석사 장교 응시 조건으로 4년제 대학 졸업하고 석사학위 가진 사람에게 한 번의 재수까지 허용해 준다. 그러므로 6년제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근본적으로 응시가 불가능한데, 나는 일 년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우리 가정의 명운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아내는 나에게 석사 장교 시험 준비를 잘하도록 수시로 잔소리하였다.

영어 시험을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연했지만, 평소 가지고 있던 책을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그런데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치른 석사 장교 영어시험 문제를 받아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00% 다 내가 풀어본 문제였다. 그동안 ‘김영 토플책’과 Oxford 대학의 ‘English Study Series’만 공부했었는데, 모든 문제가 거기서 다 나왔다. 또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그날 밤, 아내에게 “내가 한의사라는 이유로 떨어진다면 모르지만, 영어 성적으로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라고 장담하면서 오랜만에 편안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대학 다니면서 ALA 등 영어 공부를 놓지 않았던 것이 주효한 셈이다. 그 뒤에 치른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시험에서도 전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모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이다.

1983년 7월 말, 한여름의 경북 영천은 무척 더웠다. 친구 용선이가 같이 서울역에서 새마을 열차를 타고 영천까지 동행해 주었다. 역을 나오니 광장 어귀에는 3사관 학교에서 우리들을 태우러 온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저 버스를 타면 이제 당분간 사회와는 작별이라 생각하니, 버스에 바로 올라타기보다는 역 광장 옆의 다방으로 가서 시원한 음료나 좀 마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방 2층으로 올라갔다. 창밖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와 군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사이다를 주문하고서 얼마간 침묵이 흘렀고 입맛이 돌지 않아 사이다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광장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후보생들은 모두 버스에 올라타라.”라는 외침이 들린다. 입도 대지 않은 사이다를 뒤로하고 다방을 나와 친구와 작별하고 버스에 올랐다.

3사관 학교에 도착하여 바로 약 120명 단위의 8개 훈육대 (중대 규모)로 나뉘어 숙소로 갔다. 오후 내내 군복을 비롯한 각종 개인 물품과 장비를 배급받았다. 매번 받을 때마다 선착순이다.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은 흘러내리고 숨은 헐떡거린다. 그날 밤늦게까지 얼굴에 열이 오르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5시 반부터 구보로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일찍 잠을 자야 하는데, 벌써 2시 반이다. 낮에 역전 다방에서 입도 대지 않고 남겨두고 온 사이다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조용히 세면실로 가서 수돗물로 배를 잔뜩 불리고 나서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석사 장교 (예비역 사관) 훈련은 영천의 3사관 학교에서 실시되었다. 처음 3개월은 육군 장교로서 필요한 각종 훈련 (제식 훈련에서 특수전까지)을 마치고 2개월간 철책선이 있는 최전방에서 소대장 실습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3사관 학교로 돌아와 1개월간 마무리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전역한다. 그 6개월간 남한에서 가장 무더운 영천과 가장 추운 동부 산악 전선에서 생활했던 경험은 그 후 살면서 겪어야 했던 무더위와 강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혹독한 훈련은 강인한 군인을 만든다. 인내한 만큼 그 한계는 움직인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면서 훈육 대장의 명령으로 나는 의무 후보생으로 임명되었다. 더운 날씨에 받는 훈련으로 후보생들은 땀을 엄청나게 흘린다. 휴식 시간마다 나는 후보생들에게 보리차와 함께 소금 정제 한 알씩 나눠주었고, 일과를 마치면 그날 다친 후보생들에게 침과 뜸 치료를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한겨울 2개월간 최전방 철책선에 배치되었다. 나의 주된 임무는 대대의 각 소초를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을 위해 침과 뜸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각 훈육대는 중대장 후보생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간부 후보생을 일정 기간 돌아가면서 임명하고, 간부후보생 근무실에서 지내게 한다. 의무 후보생인 나와 기수 후보생은 교체 없이 말뚝으로 전 기간을 간부 후보생 근무실에서 생활하였다. 서로들 친하게 지내다 보니 고된 훈련도 그리 힘들지 않을 수 있었다. 아내가 면회를 오면 그들이 더 신나 한다. 양손 가득 싸 온 불고기와 음식들로 면회 날은 온통 그들 잔치였다.

3사관 학교에서의 마지막 훈련과정은 특수전이다. 크게 침투와 경계근무로 나뉘는데, 항상 밤에 이동하고 낮에는 교육받거나 휴식을 취한다. 2주간 영천 일대 200여 km를 돌아다녔다.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세면도 제대로 못 하다 보니 몰골이 형편없어 동네 주민들로부터 무장공비 출현 신고가 들어가기도 했었다. 대개 10명 단위로 이동하는데, 나는 지도를 잘 읽는 편이어서 맨 앞에 가는 첨병 역할을 하였다.

하루는 달빛도 없는 그믐밤 산등성이에서 앞서가다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나무뿌리에 걸려 무릎 염좌 부상을 입고 조기 귀대 조치가 되어 2주간 의무실에 입원했었다. 같은 방을 썼던 간부 후보생들이 일과 후에는 통닭이나 통조림을 들고 문병을 와서 그간 빠졌던 5kg 체중이 열흘 만에 복구되기도 하였다.

한겨울 최전방 철책선 아래 경계부대에 배치된 후보생들은 각 小哨(소초)에서 소대장 실습을 한다. 소초 (GOP)는 해안 경계, 강안 경계 등의 경계 작전 부대에서 신속한 초동 조치를 위해 소규모 인원이 파견되어 상주하는 시설이다. 나는 현지 대대장의 요청으로 大隊(대대) 구호소에 배치되어 매일 군의관과 위생병을 대동하고 대대 전 지역 소초를 순회하면서 침과 뜸 치료를 하였다. 방문하는 소초마다 우리 훈육대 후보생 친구들이 실습을 하고 있는 터라, 오가는 길에 나는 그들에게 동료들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두 달간의 전방 소대장 실습을 마치면서 나는 연대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고, 이는 다시 3사관 학교로 연계되어 전역하는 날 3사관 학교장 표창장을 받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군대에서 한의학은 참으로 유용한 의료임을 실감하였다.

1984년 1월 말, 영천 3사관 학교에서 예비역 사관으로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하였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