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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글 전용의 시대가 되면서 다소 빛이 바랬지만, 서예는 오랜 시간 한국문화의 중심을 이뤘던 예술 분야다.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명필이 있었고, 지금도 회자될 만큼 그 위치를 공고히 했다. 근현대기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를 말하자면 여초 김응현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이 감탄을 금치 못한 명필

여초는 근현대 한국서단의 대가 중 대가였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안동 김씨 집안 여초의 형제 모두가 명필이었다. 첫째였던 경인 김문현, 일중 김충현 역시 시대의 대가였으며, 백아 김창현 선생은 뛰어난 명필이자 엄청난 암기력을 소유한 한학자였다. 형제 모두가 한국을 대표하는 명필로 칭송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이었다. 형제는 둘 다 모든 서체에 능했다. 전서, 예서, 행서, 해서, 초서로 구분하는 5체를 하얀 종이 위에 자유자재로 풀어놓았다. 하지만 일중의 글씨가 품이 넉넉하고 온화한 느낌이었다면 여초는 다소 날이 바짝 선 것 같은 기백이 돋보이는 서체를 가졌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명필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온갖 글씨를 도맡아 썼는데, 지금처럼 컴퓨터로 CI를 만들기 전에는 기업의 간판이 대부분 이 형제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뿐인가. 사찰이며 서원의 현판, 지역의 명소에도 두 사람의 글씨가 들어갔다.

여초의 글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과 수교하기 이전, 민간 교류 차원에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한국은 교류가 없어 서로 상호 간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만 하던 시기였다. 중국 산둥성을 찾은 여초는 중국 서단의 거물들과 만난 자리에서 붓을 들었고 그가 글씨를 써 내려갈 때마다 중국 측 인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전한다. 중국 서안교대 종명선 교수가 남긴 평이 여초의 글씨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을 대변한다.

“(그의 글씨는)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

이후로 여초는 산동성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 전역의 초대를 받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민간 교류의 노력이 1991년 한중수교의 작은 단초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소 순탄한 일생을 보냈던 일중과 달리 그의 동생 여초는 말년에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뇨병과 합병증, 중풍, 파킨슨병에 시달리던 그는 몸의 절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손으로 붓을 들어 글씨를 쓰는 서예가에게 이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왼손으로 붓을 들었다. 김응현 선생의 앞세대 인물이었던 검여 유희강 선생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초는 그렇게 왼손으로 쓴 작품을 모아 ‘좌수전’이라는 전시를 열만큼 오른손과는 또 다른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가기도 했다.

인제에 남은 그의 마지막 삶

이렇게 길게 여초 김응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을 쓴 것은 아쉬워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에 대해 너무나 잘 모른다. 한글 전용 시대가 열리면서 서예, 나아가 서법미학이라는 미학의 영역을 구축했던 그 세계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필요성도, 예술성도 예전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인제에 있는 여초서예관의 존재는 각별하다. 여초라는 한 사람의 인생과 작품에 집중하고 있지만, 한때 왕희지, 구양순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중국의 명필들과도 비견되었던 작가의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어서다.

이 박물관이 인제에 만들어진 것은 생전 여초가 인제와 맺었던 인연 덕분이었다. 그는 말년에 인제 백담사 인근으로 옮겨와 ‘구룡동천’이라는 토굴을 짓고 여기서 기거했다. 그 발자취를 계기로 인제군은 기꺼이 여초라는 서법의 천재를 위한 박물관을 건립한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명멸했던 그 많은 명필 중 누구도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는 사라져가고 있는 서예라는 예술 분야에서도 어쩌면 마지막 보루 같은 공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터. 여초라는 사람이 남긴, 그를 위한, 이 거대한 공간은 그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 우측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한다. 박물관에서 도드라지게 느낄 수 있는 건 여초가 지금도 살아서 이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듯 행적과 흔적을 잘 보존해 두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첫 번째 전시실이다. 여기에는 여초 김응현이 평생을 보냈던 서재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그가 사용하던 책상이며 그 위에 올려두었던 기물까지 그대로다. 그 반대편에는 여초 김응현이라는 인물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자료를 배치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지난 행적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서예계를 잘 모르는 이에게는 생경할 수 있는 여초를 어떻게 잘 이해하도록 도울 것인가가 박물관 측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을 고려해 보면 첫 번째 전시실의 역할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다음부터는 2층으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여초 김응현이라는 명필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그가 남긴 수없이 많은 작품 중 일부가 빼곡하게 이 공간을 채운다. 아직도 여기에 선보이지 않은 수천 점의 작품이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박물관 측에 따르면 여초 선생의 작품을 비롯한 유품, 국내외 서법 관련 자료, 서적 등 총 6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여초의 작품은 어떤 글씨체로 쓰였든 한결같이 정갈하다. 상하좌우의 대칭도 완벽하다. 붓이 지나간 획 하나하나에서는 과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명필과 범인의 글씨가 보여주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지점이다. 보기만 좋은 글씨와 힘이 느껴지는 것. 그 획이 모여서 하나의 글씨를 이루고 글씨가 모여서 작품을 완성한다. 획이 가늘다고 부러질 듯 약하지 않다. 굵게 힘주어 눌러 써 내려갔다고 해서 둔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완벽한 균형이다. 심지어 물 흐르듯 흘러 내려가는 초서마저 그 흐름 속에 힘과 균형미를 갖춰 두었다. 그의 형 일중의 서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엄격하고 날카로운 기운은 그의 글씨에 생동감을 더하는 것만 같다. 더불어 그가 길러낸 후학의 글씨를 통해 여초가 전한 서법미학의 근본을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서예는 그림과도 다른 색다른 재미를 준다는 걸 알려준다는 점만으로도 여초서예관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다.

  

소박한 설악의 음식

인제는 화전민이 일군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도로 사정이 지금 같지 않았던 예전에는 인제로 가는 길이 무척 험했다. 그만큼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던 도시고, 그래서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를 많이 활용했다. 여초서예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더덕식당이 있다. 인제에 많은 산채 음식점이 있지만, 이곳 역시 아는 사람끼리 입소문을 타고 드나드는 곳이다.

인제의 음식이라고 하면 황태와 산채를 첫손으로 꼽는다. 용대리는 국내 최대 황태 덕장이니 그만큼 황태음식의 진수를 맛보기에 좋다. 이와 함께 메뉴판에 도드라지게 표기된 것이 더덕구이다. 황태해장국에 황태구이와 더덕구이. 인제에서 맞이하는 아침 식사로는 제격인 메뉴들이다. 주문이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상위에 찬이 깔렸다. 역시 산나물로 차려낸 반찬이 주를 이룬다. 쌉싸름하고 고소한 온갖 산나물의 맛은 도리어 진한 감칠맛의 황태구이와 조화를 이룬다. 입맛 없던 사람도 수저를 들게 할 만한 맛이다.

황태구이와 산나물 몇 점을 집어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밥으로 손이 간다. 갓 지어 내주는 이 집의 밥은 과연 밥상의 중심으로 손색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쌀밥과 곁들인 국이 기가 막히다. 순식간에 밥 두 그릇이 뚝딱 사라진다. 그럼에도 자꾸만 밥 한 그릇을 더 시켜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아삭한 더덕구이가 자꾸만 밥을 부르는 탓이다. 더덕식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큼지막한 더덕을 구워서 내준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크기가 클수록 맛이 좋다. 그만큼 자라는 동안 많은 영양소를 끌어안고 고유의 맛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더덕구이를 먹는 내내 함께한 일행들은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산채로 차린 양질의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역시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인제여서 가능한 일. 소박하지만 소박하지 않은 설악의 맛이다.

더덕에는 사포닌 성분이 많아 인삼에 버금갈 만큼 몸에 좋은 식재료다. 특히 기관지에 좋은 약재로 잘 알려져 있다. 혈당 조절과 동맥경화에도 도움을 주며 콜레스테롤 감소에 효과가 있다. 염증을 완화해 주고 기침, 가래, 천식을 치료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