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CRIC

새벽 공기는 제법 서늘해졌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샛별이 보이는 시간부터 차를 몰아 안성의 석남사로 향했다. 680년 (신라 문무왕 20)에 창건했다고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산사는 그 자체로 부처의 세계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에는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의 흔적이 남는다. 안성의 석남사도 그렇다. 한때는 이곳에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과거 이 절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간데없다. 절이 크지도 않고 머무는 이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고요한 산사일 뿐이다. 이곳은 안성과 진천의 경계에 선 해발 540미터 높이의 서운산 자락. 푸른 여명은 어느 새 맑은 아침의 풍광으로 바뀌고 있었다.

안성의 석남사가 유명세를 띌 수 있게 해 준 건 다분히 계곡의 덕이 크다.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계곡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흐른다. 깊은 그 안쪽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이 석남사의 자리다. 서운산이 그리 넉넉한 산세는 아닌 탓에 산 사면은 위를 향해 솟았다. 다소 가파르다. 그 비탈을 따라 가람이 배치돼 있다. 산을 거슬러 오르는 계단은 석남사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을 자아낸다. 보통은 산사라고 해도 위로 오르는 템포가 그리 급하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찰 대부분이 그렇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올라도 충분하고 마침내 부처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 마음도 차분하게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리듬감이 다르다. 계단의 경사도 제법 가파르고 한 단 한 단 거슬러 오르는 동안 호흡이 차오른다.

산사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가람의 배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찰은 속세를 떠나 부처를 만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산사의 안쪽은 부처의 세계다.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통과해서 세간의 온갖 탐욕에 물든 세계를 벗어난다. 사천왕은 삿된 존재가 부처의 세계로 오르지 못하도록 지키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무장을 한 채 험상궂은 표정으로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이유다. 그 위로 오르면 비로소 속세를 벗어난 극락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국 사회, 나아가 중국의 문화에서부터 비롯한 여러 보살과 나한이 그 세계를 지키고 있고 때로는 이 산을 지키는 산신을 모셔두기도 한다. 극락이라 부르는 천상의 세계에서 더 나아가면 최상단에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사를 오르는 일은 이처럼 세속을 벗어나 천상계로 들어서고 한층 더 나아가 부처님을 만나는 희열의 과정으로 꾸며져 있다. 산을 오르는 행위가 그 자체로 일종의 오페라처럼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진다.

석남사의 가람배치는 이런 구성을 압축적으로 펼쳐 놓았다. 전각의 배치와 기능이 오롯이 산사의 그것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꼭 필요한 요소는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 모든 구성이 빠짐없이 구현돼 있었을 테지만, 자그마한 산사로 몸집을 줄인 지금은 나름의 기능만을 갖춘 셈이다.

아침의 산사 그리고 마애여래불

어느덧 산사의 공간으로 아침이 찾아들었다. 떠오른 태양이 뿜어내는 햇살은 산의 왼편 저쪽에서 점점 밝게 물들어 온다. 아직은 어둑했던 새벽이 이렇게 물러간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저 멀리 대웅전 안쪽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이 보인다.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얼굴에는 어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세계로 나아간 이의 얼굴은 말없이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다. ‘괜찮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영원한 것은 없다. 네가 힘들어하는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으니 괴로워하지 마라.’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그것이 마음으로 물들어 오는 것은 다르다. 사찰이라는 공간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것을 마음으로 전하는 지혜의 전당이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힘들 법도 한데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운전하는 동안 올라왔다 사라졌던 온갖 잡념도 이미 꺼진 촛불처럼 계단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수십 개의 계단을 모두 지나고 대웅전 앞에 서니 어느새 날이 하얗게 밝았다. 아침이 산과 산 사이로 쏟아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차가운 푸른빛이 따스한 저 햇살에 자리를 내어준다.

뒤를 돌아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그 크기를 따져보자면 얼마의 수치로 답할 수 있겠지만, 존재감의 부피는 한없이 크다. 대웅전을 온통 가득 메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인적 없는 산사는 염불 소리조차 없이 고요한 말 그대로 적멸의 공간이 되었다. 삶에 상처받은 이에게 이 순간은 말 그대로 치유의 시간이다.

사실 석남사에는 찾아볼 문화재가 꽤 많다. 대웅전 (경기유형문화재 108호)을 비롯해 영산전(보물 823호), 석탑과 부도 등이 보물처럼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알아야만 보게 되는 그 보물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산사의 곳곳을 둘러보다가 석남사가 숨겨둔 마지막 보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절을 벗어나 산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보물이다.

  

절을 벗어나 산길로 방향을 바꿔 잡았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산길을 따라 계곡을 올랐다. 낮다고도 그렇다고 높다고도 하기 어려운 이 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두 시간 남짓하다는 설명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번 보물찾기는 구태여 정상까지 오를 필요는 없다. 산길을 따라 15분 남짓 오르다 보면 한쪽으로 팻말이 보인다. ‘마애여래입상’.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산을 오르며 발걸음 내딛는 데 집중하다 보면 마애여래로 향하는 길을 놓치기 십상이다. 팻말을 봤다면 가야 할 방향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샛길로 나가면 바로 머리 위에 거대한 바위가 보이고 마침내 숲속에 감춰져 있는 마애여래입상 부조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없이 이 시간, 오래전 석공이 일일이 바위를 다듬어 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부처님을 세상에 꺼내어 놓은 결과물을 마주하는 건 그 자체로 감동이다. 산사의 대웅전에서 만난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마음을 잔잔하게 흔든다.

이 느낌이 필요해서 내가 이곳에 왔구나. 나에게 필요했던 치유의 시간은 이런 것이었구나. 투박하게 새겨진 마애여래의 미소 아래서 비로소 석남사를 찾아온 이유를 발견한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미곡창고의 변신

안성은 쌀농사를 짓기에 썩 괜찮은 지형이다. 안성 일대를 차로 돌아다니다 보면 너른 논을 숱하게 마주한다. 평택 못지않게 평야가 펼쳐지는 곳이 안성이다. 1961년부터 농협은 농업창고업법에 의해 창고사업을 시작한다. 영농자재를 성수기 이전에 미리 비축했다 필요할 때 공급하기도 하고 생산한 농산물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적기에 배출하곤 했다. 1970년대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정부양곡 보급량이 늘어나자, 전국에 1만 개 이상의 미곡창고가 건설됐다. 하지만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면서 이 창고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2000년대 이후 이런 창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건 그래서다.

안성시 보개면의 보개농협은 색다른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창고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뻔하다. 누구나 다 하려는 그 길을 택하느니 청년들이 이 공간에서 해 보고 싶은 일을 도전할 수 있도록 했다. 창고를 카페로 바꾼 건 그래서였다. ‘보개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카페는 그렇게 탄생했다. 겉에서 보면 그저 흔하디흔한 미곡창고다. 그러나 왼편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주 잘 꾸며진 카페가 나타난다. 누가 보아도 이 안을 꾸민 건 젊은 감각이다. 부근을 돌아봐도 이런 인테리어와 감성을 갖춘 건축물은 이곳밖에 없다.

메뉴는 여느 카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안에서 눈에 띄는 건 ‘보개라떼’라는 이름이다. 보개면에서 생산한 현미를 이용해서 쌀 크림을 만들었고, 이걸 올려서 완성하는 라떼다. 보기에도 제법 예쁘다. 과한 꾸밈이 없어 다소 수수한 느낌마저 들지만, 단아한 아름다움도 엿보인다. 하얀 현미 크림은 은은한 단맛을 띈다. 쌀이 가진 단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입안에서 긴 여운을 만들어 낸다. 이 단맛이 우유를 넣은 커피의 쌉싸름한 맛과 괜찮은 조화를 이룬다. 크림 위에 올린 건 현미를 튀겨서 만든 것. 아작아작 씹히는 그 식감도 재미있다.

이 카페는 건물이 가진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2층에 올라가면 커다란 통창을 통해 미곡창고의 작업 광경을 구경할 수 있다. 이게 무슨 구경거리가 될까, 싶겠지만 의외로 농촌보다는 도시에서 자란 세대에게 꽤 흥미진진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곳을 찾아온 손님들은 카페를 둘러보다 이 통창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구경하곤 했다. 허름한 미곡창고는 이렇게 변신을 시도하고 젊은 세대를 손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제는 이런 공간이 여행자를 불러 모으는 시대다. 보개농협의 선택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벼에서 왕겨를 제거한 쌀인 현미는 쌀겨와 배아가 남아 있어 백미에 비해 영양소가 훨씬 풍부하다. 무엇보다 식이섬유가 풍부한데 이는 포만감을 주어 다이어트에 좋고 장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철분도 백미에 비해 5배 이상 많고, 리놀레산 (linoleic acid)이 다량 함유돼 있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키고 혈액순환을 개선한다. 피토스테롤 (phytosterol) 성분은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같은 혈관 질환을 예방하고 증상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