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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일주일 차이였다. 지금쯤이면 슬슬 단풍이 올라올 거로 생각했는데, 시기상조였다. 그럼에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가을이 성큼 곁으로 다가왔다는 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수보살의 땅

여행이란 묘한 면이 있다. 생전 갈 일이 없고, 가고 싶어도 좀처럼 기회가 없다가도 한번 다녀오면 갈 일이 계속 생긴다. 20년 가까이 출장을 다니고 여행을 다니면서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그런 고장 중 하나가 고창이었다. 다녀와야지 생각만 하고 다른 일정에 밀려 좀처럼 갈 계획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마음먹고 한번 다녀오니 몇 년간 줄줄이 일정이 잡혔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지는 처음 가는 곳이었다. 그저 가을이 다가오니 가 볼 법하겠다는 생각에서 떠난 일정이었다.

고창의 문수사.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도리어 이 절 주변의 단풍나무숲이 세간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문수사의 단풍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463호다. 이유는 이 숲의 역사다. 나무마다 수령이 100년에서 최고 400년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만큼 오래 산 단풍나무는 흔하지 않다. 2년 전 내장산의 단풍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은 적이 있는데, 숲이 아닌 단일 나무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외에는 아직 고창 문수사의 단풍나무숲과 비교할 만한 곳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문수사가 있는 곳은 고창의 문수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수’라는 명칭은 보살의 이름이다. 지혜제일, 그러니까 가장 현명한 현자인 문수보살의 이름을 딴 절이 문수사고, 이 절이 그만큼 유명해서 산에도 그 이름이 붙었다. 고창은 불교의 보살 신앙이 유독 도드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선운사의 도솔암은 미륵신앙의 본거지다. 동학혁명 당시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건 도솔암 아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미륵불이었다. 그 미륵불의 배꼽에는 네모난 돌이 있다. 그 돌을 빼면 안쪽에 비서가 있고, 이 비서가 세상에 나올 때 미륵이 현신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미륵불이 열 새로운 미륵 세상에 대한 기대는 충분히 달아올랐다. 1894년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이 배꼽 안에 든 비서를 빼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이만큼 전라도 땅은 신앙에 기댄 이가 많은 곳이었다.

같은 고창 하늘 아래 또 다른 성지가 문수사다. 이곳은 문수 신앙의 중심지. 그 시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의 청량산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이 산이 청량산과 비슷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 길로 산의 석굴을 찾아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고, 땅속에서 문수보살입상을 발견했다. 그 자리에 지은 절이 지금의 문수사다.

싱그러움을 물들이는 가을의 색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 차를 두고 슬슬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일주문을 지나 숲길로 들어선다. 안내판에는 문수산 입구부터 문수사 아래까지 80미터 정도가 좌우로 전부 단풍나무라고 쓰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더 긴 듯했다. 좌우로 보이는 게 온통 단풍나무였다. 사이사이에 참나무, 뽕나무 같은 것이 섞여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워낙 단풍나무가 많아서 눈 돌리는 곳마다 아기 손바닥 같은 단풍 이파리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단풍의 붉은 빛이 아직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쉽기는 하다. 유독 가을이 빨리 다가오는 듯해서 가을맞이를 할 겸 찾아갔음에도 아직은 계절의 끝자락이 길었다. 알록달록한 빛깔보다는 싱그러움의 기세가 더 등등했다. 숲은 제법 깊다. 문수사의 자리가 문수산의 복판인지라 그곳을 향해 가는 길도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나 있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동안 하늘이 열려 햇살이 밝게 떨어지는 구간과 어둑할 만큼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우거진 구간을 반복해서 통과했다. 다행인 건 위로 올라갈수록 가을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싱그러운 푸른 빛 너머로 붉은빛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었다. 확실히 조금씩이나마 고도가 올라갈수록 가을이 내려앉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가을은 절정일 때 보는 이를 홀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지만, 이제 막 물들어 오는 선명한 색깔이 전하는 생명력도 가슴을 뛰게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시로 산에 올라가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계절의 변화를 가장 빨리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어느 정도 올라가니 단풍나무의 굵기와 자태가 확연히 달라진다. 한눈에도 노거수임을 알 수 있을 법한 것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곳의 단풍나무는 평균 10~15미터 높이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2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주장하는 바로는 백제 의자왕 당시에 심어진 것들이라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로 조사한 결과 100~400년의 수령은 확실하게 확인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숲이다.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종종 마주치는 오래된 숲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민둥산이 많았고, 그만큼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이 땅에서 오래 살아남은 숲은 차라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다.

단풍나무숲을 더 살피고 싶었다. 그러나 숲 안쪽으로는 출입이 통제돼 있다. 오래된 나무와 숲을 보호하려는 조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막아두지 않으면, 사람이란 무심결에 이 귀한 숲을 해치기 십상이다. 조금은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문수사 안쪽을 잠시 살피고 나오기로 했다. 가파른 경사에 앉은 절의 안쪽은 평탄했다. 이곳의 스님네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곳곳이 말끔하고 단정하다. 구태여 단풍나무가 아니더라도 이 절의 분위기만으로 찾아올 만한 이유는 충분할 듯했다. 절 마당의 바깥을 둘러친 꽃담장은 푸근하고 예쁘다. 곧 빠른 속도로 단풍이 이 숲을 온통 물들이면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궁금해지는 자태였다.

정성 들여 키운 채소의 아삭한 맛

이른 단풍을 만나지 못했지만 대신 고창의 맛을 찾아보기로 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고창 주민이 즐겨 찾는 쌈밥집이 있다고 했다. 이름부터 ‘텃밭쌈밥식당’이다. 주인이 쌈 채소는 물론이거니와 배추, 무, 양파, 고추, 참깨, 콩, 아로니아까지 모두 직접 재배하고 수확해서 내놓는다. 전라도를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이 땅의 사람은 확실히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 그걸 강조하고 손님이 알아줄 때 뿌듯함을 느낀다. 전라도의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식재료가 주는 건강함을 즐기는 재미가 크다.

이 가게는 쌈밥과 함께 토종닭 코스요리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4인 기준 8만 원인데 닭 육회, 똥집구이, 닭발볶음, 닭갈비, 후라이드치킨, 백숙, 닭죽까지 8가지 메뉴를 올린다. 해남에서는 ‘통닭’이라고 부르는 이런 코스 메뉴를 이제는 전라도 곳곳에서 만난다. 이걸 알았다면 예약을 해도 좋았을 법하다. 아쉽지만, 이건 다음 기회에 지인들과 함께 와서 먹어보는 걸로 하자. 혼자서는 쌈밥으로도 충분하다.

상이 차려지는데 쌈의 종류와 양부터 엄청나다. 혼자서는 결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푸짐하게 차려졌다. 갓김치에 묵은지, 무생채무침, 곰취절임 등등 반찬도 상을 가득 메운다. 전라도답게 밥에 얹어서 비벼 먹으라고 젓갈도 함께 올린다. 메인은 우렁이와 숯불구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돌솥밥이 먹고 싶어서 숯불구이로 선택했다. 자글자글하게 잘 구운 돼지고기가 짭조름하니 쌈 싸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곁들여서 우렁된장찌개가 나왔다. 이쯤 되면 우렁쌈밥을 안 시킬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쌈밥은 뭐니 뭐니 해도 푸성귀를 종류별로 싸 먹는 맛이다. 익숙한 상추도 좋지만 이럴 때는 근대나 겨자채의 쌉싸름한 맛을 더 선호한다. 고기든 우렁이든 안에 넣어서 먹는 음식을 적당히 압도하는 듯하지만, 뒤로 갈수록 고유의 맛을 더 살려주는 것 같아서다. 돌솥밥은 흑미에 고구마, 대추, 은행 등을 넣고 함께 지었다. 갓 지어낸 밥의 단맛에 대추와 고구마의 단맛이 더해지니 더 바랄 게 없다. 맛있는 밥상 하나면 여행의 모든 순간이 행복해지는 것만 같다. 하물며 가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야. 이렇게 한 계절의 끝과 시작이 풍성한 밥상으로 장식되고 있었다.

갓은 겨자과 식물에서 파생한 변종 중 하나다. 특유의 향과 매운맛이 인상적이다.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로 알려져 있다. 수분 함량이 높고 다량의 무기질과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엽산이 풍부해 성장기 발육을 돕는다. 피부 미용에 좋고 스트레스 지수를 완화해 주는 것도 갓이 가진 장점이다. 이외에도 이뇨 작용을 원활하게 해서 노폐물을 배출하고 부기를 빼는 데 효과가 있다. 또 항산화 물질인 시니그린 (sinigrin)과 글리코시놀레이트 (glucosinolate)가 많아 암 예방에도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