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CRIC

인연

나는 1997년에 입문한 이래로 8체질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입문 후에 계속 자료를 모았다. 무언가를 모으는 것,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 이런 게 재미있다. 2009년 3월에 8체질의학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를 쓰고 싶어졌다. 창시자인 권도원 선생은 책 쓸 여유가 없는 듯하니 내가 나서서 그분의 수고를 덜어드려야겠다고 혼자서 작심했다. 그런 후에 8체질론과 8체질의학에서 쓰이는 기본적인 용어와 개념을 해설하는 책이라는 콘셉트로 기획안을 만들었다.

만약 내가 전공과 관련된 책을 내는 날이 온다면 행림서원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고 있었다. 그래서 3월 25일에 무작정 등기우편으로 종로 5가 행림서원의 이갑섭 사장에게 기획안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갑섭 사장이 4월 1일 당일특급 우편으로 만나자고 답신했다. 4월 9일 오후 3시에 행림서원을 방문하여 뒷골목에 있는 커피숍에서 이갑섭 사장과 책 만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판사로서 행림서원은 이미 오래전에 몰락한 상태였지만 나는 그때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이 행림출판사에서 펴낸 책인지 알지 못했다.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그와 행림서원의 사정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만날 때마다 이갑섭 사장은 80년대의 영광 속에 머문 것처럼 보였다. 사실 ‘출판은 한 방’이라며 그런 한 방이 다시 그에게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갑섭 사장과 나는 『학습 8체질의학』 (2009. 11.), 『학습 8체질의학 Ⅱ』 (2013. 10.), 『체질맥진』 (2017. 4.), 『개념 8체질』 (2017. 12.), 『체질침의 새로운 처방 ZBPset』 (2017. 12.), 『임상 8체질의학 Ⅲ』 (2018. 3.)을 함께 만들었다. 그와 책을 만들던 10년간, 그는 8체질론을 공부하는 나의 특별한 동지였다.

『학습 8체질의학』 행림서원 2009. 11.

100년 기념 이벤트

내가 행림서원 100년을 기념할 이벤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였을 때는 2019년이다. 이갑섭 사장이 2019년 6월 5일에 별세하고 그분이 크게 기대했던 『시대를 따라 떠나는 체질침 여행』이 10월 20일로 정해 둔 발행일을 앞두고 미리 나왔다.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경희대학교의 김남일 교수가 강의를 맡고 있는 한의예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해달라며 강의 시간에 초대해 주었다. 강의 초청을 받고 강의안을 꾸리면서 체질침의 역사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내 책을 펴낸 행림서원의 역사도 정리해서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았다. 의사학 시간이니 말이다.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한의예과 2학년 학생들에게 「역사 속의 체질침」이라는 주제로 강의하면서 후반부에 행림서원 3대의 역사를 소개하였다.

2019년 10월 17일 경희대학교 한의예과 2학년 A반 강의 모습

이갑섭 사장이 별세한 후에 출판사로서 행림서원은 사라지지 않고, 여동생인 이정옥 대표가 운영하는 평민사의 임프린트 (imprint)가 되었다. 이정옥 대표와 행림서원 이름으로 『8체질론으로 읽은 동의수세보원』 (2020. 5.), 『수세보원 들춰보기』 (2021. 7.)를 더 만들었다. 행림서원은 몰락했지만 나는 마치 행림서원에 전속된 작가처럼 12년 동안 아홉 권의 책을 썼던 것이다.

2021년 10월 서울한방진흥센터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에서 2022년 상반기 전시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행림서원의 전속작가 이강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또 다른 전시회를 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술대회를 개최할 역량은 더 없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작가는 글 쓰는 도리밖에는 없으니, 그렇다면 100년 기념 출판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작심하면 즉시 실행한다. 2021년 10월 13일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행림서원 100주년 특별기고

2022년 6월 30일 권도원 선생이 별세했을 때, 한의신문사의 강환웅 기자가 내게 추도사 작성 부탁을 해오면서 그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2023년이 반년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대한한의사협회의 기관지인 한의신문에 행림서원 100년 기념 기고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환웅 기자에게 10회 정도 연재하는 기획을 알렸더니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7월 14일 오전에 한의사협회로 직접 방문하기 위해서 근무처에 휴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예정된 날이 되기 전에 연재를 거절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거기에서 좌절할 수는 없었다.

2021년 12월부터 경희대학교 한의약융합연구정보센터 (KMCRIC)의 웹사이트에서 「8체질 가이드」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었다. 7월 14일 아침에 경희대학교로 가서 센터 실장을 맡고 있는 신지영 박사와 협의했다. 이향숙 센터장도 「한의사 이강재 원장의 행림서원 100주년 특별기고」를 웹사이트에 게재하는 것을 승낙했다. 첫 편 원고인 ‘책방의 노부인’을 2022년 7월 23일에 KMCRIC 이메일로 발송했다.

10편까지 쓰게 되리라고는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다. 7월 27일에 자성당서점 이슈가 생겼고 글을 쓰는 도중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기도 해서 하나씩 글이 늘어났다. 8월 5일부터 9월 28일까지 연재했다.

전자책

특별기고 원고를 그냥 두기는 아쉬워서 책으로 만들 궁리를 하다가, 『신의학요감』 초판본을 소장하고 책 표지 사진을 제공하기도 했던 구미 우리경희한의원의 서정철 원장에게서 전자책으로 만들어 보라는 아이디어를 들었다. 편집과 파일 작업은 2023년 1월에 끝났다. 제작이 완료된 파일을 전자책 서비스를 하는 교보문고 웹사이트에 업로드해야 한다. 평민사는 대표와 디자이너 두 분이 일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본업이 있다. 제작된 파일을 교보문고에서 원하는 형식으로 다시 손보아야 하고, 변경된 업로드 매뉴얼을 새로 숙지해야만 했다. 전자책 『행림서원 100년』이 교보문고 온라인에 올라온 것이 2023년 5월이다. 무료로 공개한다.

『행림서원 100년』 행림서원 2023. 1.

특별기고를 통해서 기존에 잘못 알려졌던 정보를 몇 가지 교정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1923년, 안국동, 행림서원’이라는 프레임이다. 특별히 강조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동시에 성립하지 않는다.

『동무공의 생각』

2021년 10월 13일부터 쓰기 시작한 원고는 일본어와 중국어 번역을 추가하면서 해를 넘겼다. 중국어 번역까지 완료된 것이 2022년 8월 14일이다. 난제는 또 있었다. 본문 편집을 맡은 디자이너가 외국어 원고에 대한 경험이 없던 것이다. 나는 ‘행림서원 100년이 되는 2023년에 행림서원의 이름으로 나온 첫 책’이라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했다. 한·중·일 3개 국어로 발간된 『동무공의 생각』 (2023. 1.)이다. 행림서원에서 나온 내 열 번째 책이다.

『동무공의 생각』 행림서원 2023. 1.

유춘동 교수

2023년 8월 7일에 내가 근무하는 한의원의 접수 데스크로 전화가 왔다면서 직원이 메모를 건넸다. ‘윤춘동 강원대 국문과’라고 적혀 있고 휴대폰 번호가 있었다. 강원대학교의 웹사이트를 검색했더니 국문학과의 유춘동 교수였다. 사진을 보니 젊은 분이다. 전화를 했다. 서지학을 전공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향약집성방』이 출판된 이력을 보다가 책보다는 행림서원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보문고에 올라온 전자책에 대해서 물었다. 행림서원에 관심을 가진 분이 있다니 반가웠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행림서원 100년』과 관련된 자료를 그의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8월 11일에는 한의원으로 찾아왔다. 사이트에 있는 사진은 10년 전 거라면서 세월이 바꾼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웃었다. 행림서원과 관련한 논문을 쓸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자료 검색을 도왔다. 8월 20일에 논문이 완성되었고 한국서지학회의 『서지학연구』에 투고했다.

한국서지학회 https://koreabiblio.jams.or.kr/co/main/jmMain.kci

유 교수는 이번 논문을 통해서 몇 가지를 새로 발굴했다. 먼저 1929년 말에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행림서원의 도서 목록이다. 여기에서 자성당서점이 있던 ‘광화문통 38번지’에서 행림서원이 출발했음을 발견했다. 그런 후에 ‘관훈동 112번지’로 이전한 것도 확인했다. 그리고 행파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간 이유가 1943년에 일제의 검열에 걸려 행림서원이 휴업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새로 밝혔다. 이것은 1947년에 경향신문에 실린 행림서원의 영업 재개 광고를 통해서다. 그리고 이전에 잘못 알려졌던 정보들도 몇 가지 교정했다.

광화문통 38-1번지 / 관훈동 112번지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행림, 백년의 기억」이 10월 1일에 끝났다. 유춘동 교수의 논문 「한의학 전문 출판사 행림서원의 설립, 사세 확장에 대한 보론」은 9월 30일에 발행된 『서지학연구』 〈95집〉에 실렸다. 그리고 내가 쓰는 이 글을 통해서 또 누군가는 ‘행림서원 100년’을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행림서원의 100년이 지나가고 있다.

※ 「행림서원 100년을 보내며」는 2023년 10월 31일에 발행된 『한국연구』 14호에 실렸다. 이 글에 그림 자료를 추가하여 두 번에 나누어서 올렸다.

© 이강재 원장과 떠나는 8체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