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이승민
[워킹맘 한의사 앤 더 시티]

안녕하세요? 저는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침구과 전문의로서 활동하면서 침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19년 미국 뉴욕으로 왔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의사로서, 강사 및 연구자로서, 또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일상과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의사 이승민 프로필

워킹맘 한의사로 정착하기

 

미국에 오기 전까지 ‘미국’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자유’와 ‘민주주의’였습니다.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된 이래, 건국이념으로 무엇보다 시민들의 자유를 내걸었던 나라, 자신들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라 자부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니까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 시작하는 한의사의 삶이 너무나도 기대되었습니다. 하루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어 뉴욕에 오고 나서 틈만 나면 한의원을 개원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러 다녔고, 엑셀 파일에 필요한 항목들을 하나하나 정리해가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 한의사로서의 삶이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대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체된 가장 큰 이유는 ‘자유의 나라’ 미국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의사 활동을 하기 위해 주별로 라이선스 취득 절차를 거쳐야 했고, 이후 취업하고 한의원을 개업해서 진료하기까지 이방인으로서, 초심자로서 배우고,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서 제 경험을 짧게나마 공유하여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분이 아시는 것처럼, 뉴욕과 뉴저지는 워낙 가까이 있기 때문에 뉴욕에서 한의사로 일하시는 분 중에는 뉴저지 면허증도 같이 취득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뉴저지와 뉴욕에 모두 등록하였는데, 등록 절차는 두 주가 조금 달랐습니다. 뉴저지는 면허증을 등록하기 위해 기본 시험인 NCCAOM (National Certification Commission for Acupuncture and Oriental Medicine) 시험 합격은 물론, 주에서 운영하는 의료법 시험도 따로 봐야 하고, 해외 한의과대학 졸업생의 경우 토플 성적서도 제출해야 합니다. 또한, 뉴저지주에서 운영하는 의료법 시험은 뉴저지 시험 장소에 직접 가서 봐야 하므로 이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뉴욕주는 추가로 봐야 하는 시험은 없지만 임상실습 총 이수 시간을 증명서로 제출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한의과대학에서 발급해 주는 공식 증명서 중에는 임상실습 시간이 적혀 있는 경우가 없으므로, 이 서류는 직접 준비해서 학교 행정실 직인을 찍고, 밀봉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직접 뉴욕주 면허 담당자에게 보내줘야 합니다. 저처럼 미국에서 전화로 해결하려다 보면 시간이 더없이 지체될 수 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면허증이 드디어 등록되고 난 뒤, 매일 구인구직 사이트에 접속하여 조건이 괜찮은 일자리가 있으면 이력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남편이 미국에서는 학생 신분이라 당분간 저 혼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제 개인 한의원에 올인하기에는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서, 일단 부원장으로 일하면서 안정적인 수입 경로를 마련해 두고 개인 한의원은 천천히 키워나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부원장 자리는 다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등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공부한 이력도 도움이 됐겠지만, 제 생각에는 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며 본 많은 환자 수와 그 이후 여러 한의원에서 일하며 봤던 많은 임상 환자 수가 더욱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또한, 나중에 구직 후 알게 된 사실은 부원장을 뽑을 때 일반적으로 경력 이외에도 인종, 성별, 나이, 그리고 구글에 검색했을 때 나오는 정보까지 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한 것이라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부원장으로 들어오는 한의사가 원장보다 나이가 많으면 일을 시키기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 같고, 미국은 남자 한의사보다 여자 한의사가 더 많은 편이며, 따라서 환자분들이 여자 한의사에게 더 익숙해서 여자 부원장을 더 선호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또 전해 듣기로, 부원장 뽑을 때 구글을 검색해서 정보가 너무 없거나, 반대로 SNS 활동이 너무 많은 사람도 제외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부원장 자리를 확보하고 나서 개인 한의원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였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정해진 진료일에 개인 한의원에서 환자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동의보감 아카데미를 통해 강의도 하고, 강의를 통해 얻은 네트워크가 이어져 미국 한의학대학에서 침구학 강의 정규과목 수업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뉴욕과 뉴저지주 면허증 등록은 2019년 3월에 시작했지만, 6월 1일에 면허증이 발급되었으며, 대략 9월 이후에야 안정적으로 부원장 및 개인 한의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토요일은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주 6일 워킹맘 한의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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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에 대해 조금 말씀드릴까 합니다. 미국에서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미국 의료보험 시스템입니다. 미국은 한국처럼 국가 의료보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은 개인 소득 및 직업군에 따라서 보험이 아예 없는 경우부터, 보험이 있을 경우 보험 회사에 따라서, 그리고 가입된 보험 종류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진료의 범위가 정해집니다. 침을 포함한 여러 한의학적 치료도 적합한 보험 질환 코드 (예: 요통)를 이용하면 1년 동안 무제한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5~6번으로 횟수가 제한되는 경우도 있고,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비싼 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환자의 혜택이 더 많아지므로 의사들이 보험회사에 청구해서 받을 수 있는 진료비가 많아지고, 반대로 저렴한 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의사가 진료비를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곳에서 제일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보험을 청구할 때 실제 진료를 하고 치료를 행한 시간 단위로 청구를 할 수 있다 보니 한 환자를 한 시간 동안 보는 것과 다른 환자 4명을 15분씩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덕분에 의료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치료가 제공된다고 해도, 수입이 많거나 좋은 직장에 다녀서 보험 혜택이 많은 환자에게 의사는 더 많은 상담 시간을 할애하고 더 많은 치료 혜택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의사로서 보험 환자를 받을 때도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환자가 가지고 있는 보험 회사에 전화해서 가입된 보험의 종류와 보험 회사에서 커버해 주는 치료비 범위, 그리고 치료 횟수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춰서 치료 계획을 세워야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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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 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떠올렸던 건 어려서부터 접했던 책이나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조금씩 학습된 결과였을 겁니다. 미국 국민의 전반적인 교육이나 사회 시스템 내에서 ‘자유’와 ‘평등’이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의사로서 여기 정착하며 느꼈던 의료 시스템과 취업 시장에서 미국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 속 미국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렵게 정착한 반대급부로서, 우리 딸은 일주일에 6일 일하는 워킹맘 엄마 대신 아빠를 주 양육자로 인식하며 컸습니다. 첫 단어도 “엄마” 대신 “아빠”, 배고프거나 졸릴 때도 엄마 품 대신 아빠 품에서 더 안정을 찾습니다. 가끔 투덜대면 주변 분들이 그러더군요. 아이들의 부모 사랑은 돌봐준 절대적인 시간에 비례한다고. 이런 건 또 참 기가 막히게 공평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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