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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년에 비해 장마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늦장마 후에 더위가 더 심하게 올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 오니 생각나는 차가 있습니다. 차도 계절에 따라서 맛이 달라집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죠. 보통 새해 첫차는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우전이니 명전이니 하는 것도 봄에 처음 나는 새순을 말하는 이름이었을 테고, 첫물차, 두물차 하면서 채엽 시기를 나누고 첫물차를 더 귀하게 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고급 차인 말차나 교쿠로 같은 차들은 새해 첫 새순이 돋을 무렵 햇빛을 가려 성장을 억제해서 기른 어린 찻잎만으로 만듭니다.

심지어 여러 계절에 채엽하는 차나 봄과 여름에 생산하는 차, 봄과 가을에 생산하는 차 등 다양한 계절에 생산하는 차들이 있어도 대개 봄차를 최고로 칩니다. 특히 사계춘 같이 1년에 6~8회나 채엽이 가능한 품종에서 생산한 차도 봄차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에서 벗어나는 차가 있습니다. 오히려 여름에 난 차가 더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혹은 더 비싸게 팔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름이 오기 전, 여름에 더 귀한 몸이 되는 차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홍차는 여름의 잘 자란 잎으로 만들수록 맛이 진해집니다. 녹차로 만들면 너무 자란 잎은 쓰고 떫은 맛이 강해지겠지만 홍차는 그런 맛을 내는 성분들이 산화되면서 오히려 달콤한 맛과 복잡하고 풍부한 향기로 변해 갑니다. 대개 봄의 새순으로 만든 홍차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면, 잘 자란 잎으로 만든 홍차는 진하고 강한 맛의 홍차다운 홍차가 됩니다.

특히 계절에 따라 구분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차가 다즐링입니다.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산맥의 남동쪽 사면에 있는 다즐링이란 지방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훔쳐 온 차나무를 심어서 기르는 데 성공했던 지역입니다. 중국 밖에서 재배한 차나무는 그 당시 유럽인들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죠. 이때부터 다즐링은 유럽식 홍차의 고향 같은 곳이 됩니다.

다즐링의 동쪽 아삼에서 아삼종 차나무가 발견되고, 지금의 스리랑카가 된 실론 섬에서 홍차를 재배하면서 중국 동남부 지역과 인도의 아삼, 실론 이 세 곳은 홍차의 명산지로 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런 흐름과 별개로 다즐링은 유럽식 고급 홍차의 산지로 점점 더 유명해지면서 여러 다원이 생겨났고 차나무의 교배와 관리를 거치면서 다양한 홍차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 다즐링, 성마다원 세컨드 플러쉬 +

엽저는 동방미인 같은 향이 나는데, 정작 차는 굉장히 우디하고 강렬한 인상이 혀 위에 올라옵니다. 향긋하고 달콤한 느낌의 꽃향기를 닮은 향기에 감기는 맛이 정말 환상적이고 그러면서 뒤로 스치는 옅은 포도향기와 복숭아 과즙향이 느껴집니다. 차를 마실수록 떫은맛은 단맛으로, 향기는 점점 잘 익은 달콤한 과일들이 노랗게 뒹굴거리듯이 변해갑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세컨드 플러쉬 다즐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지만, 맛 자체가 비교적 강한 편이라서 맑고 가벼운 홍차를 좋아하시는 분에겐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즐링, 아리야다원 세컨드 플러쉬 +

화사한 흰 꽃향기에 뒤섞이는 달콤한 향기가 매력적입니다. 앞에 마신 홍차보다. 조금은 더 싱그럽고 생생한 말랑한 백도 복숭아를 닮은 듯한 부드러움으로 입안에 남는 생생하고 컬러풀한 맑고 상쾌한 꽃향기가 기분을 좋게 합니다. 중간엔 살짝 열대과일과도 비슷한 잘 익은 패션프루츠의 향기에 살짝 노란 황도의 맛 같은 달콤한 싱그러움이 스쳐 지나갑니다. 순수한 찻잎으로만 우려낸 홍차의 맛이 이럴 수 있다는 건 꽤 재미있고도 신기한 일이죠.

지금은 다즐링의 봄차가 연한 풀향기와 과일향기, 꽃향기, 깔끔하고 또렷한 쓴맛 등으로 시장에서 더 유행하고 있지만, 다즐링, 중의다즐링으로 불리는 현재의 다즐링의 명성을 만들어 낸 것은 여름 다즐링입니다. 다른 시즌에선 보기 힘든 머스카텔이라고 부르는 특유의 달콤하고 진하면서 상큼하기까지 한 포도향기나 경우에 따라선 사향 같은 향기가 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이 강한 경우에는 가격도 만만찮게 비싸집니다. 대개 특별히 비싸거나 수식어가 없는 여름 다즐링의 경우엔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향기거나 좀 더 화려한 꽃향기를 보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여름의 농축된 맛이죠.

+ 다즐링, 싱겔다원 세컨드 플러쉬 +

달고 시원한 인상의 다즐링입니다. 세컨드 플러쉬 치곤 연한 느낌으로 쓴맛이나 떫은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느낌입니다. 혀에 약간 휘감기는 느낌에 살짝 매끄러운 질감입니다. 약간 구수한 맛이 나면서 그 안에 단맛과 상큼한 느낌으로 변해갑니다. 찻물이 식으면 상큼함과 단맛이 더 뚜렷해지면서 머스카텔과 살짝 비슷하게 느껴지려 하지만 구수한 느낌의 단맛이 더 우위라서 전형적인 머스카텔의 느낌까지는 아닙니다. 연해서 조금 아쉬운 듯한 맛이지만 마시고 나면 약간 상큼하고 다즐링 특유의 향기로운 쓴맛이 아주 미약하게 곁들여집니다.

실론티로 유명한 스리랑카도 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스리랑카의 홍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우바입니다. 우바 역시 계절 영향이 큰 홍차로 여름철 계절풍을 받으며 제대로 자란 찻잎에선 장미향 같은 꽃향기나 민트향이 납니다. 하지만 다른 계절의 우바는 그저 좀 진한 홍차라는 느낌으로 끝날 때도 있을 정도로 한 곳에서 나온 차임에도 계절을 잘 만난 우바와 그렇지 않은 우바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차가 됩니다.

스리랑카의 우바와 비슷하게 여름에 제대로 된 맛과 향을 내는 차로 대만의 홍옥이란 품종의 홍차가 있습니다. 르웨탄이라는 유명한 관광지 주변에서 재배되는데요. 여름에 만든 홍차에서만 특유의 민트향이 납니다. 시원하고 상쾌하면서 약간 아린 청량감이 차를 마신 후에 확 올라오는 것이 특징인데 다른 계절에는 이런 청량감이 빠진 계피향이, 혹은 그것보다도 자극성이 사라져 버리면 그저 진한 홍차의 향이나 사과향 정도로 전혀 다른 맛과 향이 나서 같은 품종의 차나무가 맞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맛 차이가 납니다.

+ 딜마, 시즈널 플러쉬 우바 +

마시는 순간 자극적일 정도로 찌르는 듯한 감칠맛과 쓴맛에 딸려 있는 시원한 허브향, 조금 무거우면서 진한 민트향에 가까운 향기. 한 김 식은 차를 목에 넘기는 순간 진하고도 은은한 개성이 강한 금목서를 닮은 달콤한 꽃향기에 곁들여지는 아주 약한 훈연향, 깔끔하게 혀를 닦아 내리는 것 같은 바디감, 마시고 난 후에 점점 입안을 강조하고 있는 오래 남는 수렴성과 거기에 동반되어 나오는 단맛과 난꽃 향기가 복잡할 정도로 몰아칩니다. 풋내가 꽤 뚜렷하게 있습니다.

+ 홍옥 홍차 +

굉장히 신기할 정도의 부드럽고 싱그러운 과일향 사이로 은은하게 상쾌한 민트향이 스며들어서 시원한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단맛 사이로 느껴지는 상쾌한 기분은 정말 매력적이고도 신기한 기분입니다. 박하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구개 부분에서 또렷해져 갑니다. 그러면서도 감칠맛 있는 홍차 특유의 질감과 맛이 베이스에 깔려 있습니다.

홍차 외에도 잘 자란 잎을 산화시켜야 제대로 된 맛을 내는 건 우롱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차가 유명한 우롱차의 최고봉은 동방미인이란 차입니다. 사실 동방미인은 산화도나 차를 보면 우롱보다 홍차에 훨씬 가깝습니다. 동방미인은 특히 여름철에 만들 수밖에 없는데요. 차나무의 진을 빨아 먹고 사는 소록엽선이란 작은 벌레가 찻잎에 상처를 만들어 내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록엽선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다리는 거죠.

소록엽선의 충해를 입은 찻잎은 향기 성분이 많아지면서 독특한 향기를 만들어냅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동방미인에선 꿀향기, 들풀 같은 꽃 향기, 달콤한 맛 등 매혹적인 향기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벌레와 같이 공생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므로 농약의 사용도 제한이 될 수밖에 없고 생태 환경도 신경을 쓰는 만큼 맛 이상으로 더욱 생태 친화적인 차라는 이미지도 소비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차들이 다 그렇지만 정말 글자 그대로의 맛과 향을 가진 동방미인차는 꽤 많이 비쌉니다. 그래서 가격이 저렴한 이름만 동방미인인 차를 마시면 이런 느낌이 없을 수도 있죠. 오히려 그런 향이나 맛을 내는 차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면 쉽지 않기도 합니다.

+ 서요량다원, 동방미인 여름차 +

쌔 할 정도의 화려한 화향의 첫인사이지만 마시는 순간 매우 맑고도 가볍게 확하고 펴지는 달콤한 맛의 뒤로 온갖 꽃이 피어난 꽃밭의 꽃향기와 꿀향기가 온 입 안을 휘감고 돕니다. 바닐라향기, 백합의 향기, 이름 모를 들꽃들의 아무튼 하얀빛의 꽃향기가 초 단위로 변하는 이색적인 경험. 그리고 달콤한 듯한 여운의 뒤로는 살짝 화한 느낌이 입안에 남아 입안도 개운하고 상쾌하게 해줍니다. 향이 또렷하되 너무 강하거나 쌔 하지 않고, 달콤하지만 무겁지 않으며, 미인향이라고 부르는 묘사하기 꽤 난감한 특유의 꿀향기스러운 화사한 향기가 맛과 따로 놀지 않고 단맛 역시 살짝 더 가볍고 향기로워서 맛과 향이 분리되지 않고 같이 입안에 감돕니다.

+ 울프티, 동방미인 겨울차 +

간혹 동방미인에 밀향이나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향기 외에도 패션프루츠 같은 새콤달콤한 과일 종류가 티노트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차가 좀 그런 편인데 부드럽게 감아 도는 달콤하면서도 약간 매끄러운 듯한 적당한 질감에 살짝 자연스러운 산미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맛이 신게 아니라 향기가 약간 상큼한 쪽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맛은 달고 부드러우면서 편안한 느낌인데 달콤함의 느낌은 꿀보다는 좀 더 가벼운 황설탕 정도의 느낌입니다. 달달한 여운이 꽤 오래 남는 편인데 확실히 같은 동방미인이란 이름이 붙어도 산지마다 해마다 계절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맛과 향의 특성을 보면 겨울차겠지 싶습니다. 특히 여름차와 겨울차가 갖고 있는 방향성이 서로 다르고 맛도 서로 다릅니다. 편안하면서도 동방미인 특유의 향기에 곁들여 꿀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달콤하게 감기는 듯한 인상의 동방미인이었습니다.

+ 쯔텅루, 동방미인 +

동방미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화려한 향기와 상쾌한 허브 향기, 단맛이 조화를 이루고 화과향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3번째 잔부터는 화려한 향기는 빠져나가고 대신에 단맛이 더 뚜렷하게 올라옵니다. 복숭아의 단맛보다는 약간 씁쓸함이 깔려 있는 단맛이었습니다.

+ 개문차당, 경성미인 +

동방미인의 특유의 향은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잘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마실 때 꿀향기와 과일향이 풍부하게 느껴져서 ‘아, 이 차 정말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동방미인 차였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차는 역시 봄에서 초여름에 생산한 것이 품질이 더 좋은 게 일반적입니다. 소개한 경우도 다 특수한 조건들이 갖춰지기 때문에 일부러 여름에 생산하는 거니까요. 계절이 바뀌는 순간, 특히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은 꽤 달갑지 않은 기간입니다. 여름은 장마가 앞서 오니까 더 날씨가 신경 쓰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장마가 있고 여름이 있으니까 벼가 자라고 과일이 나올 수 있는 것이겠죠. 차도 그렇습니다. 여름에 더 맛있게 익어 나올 올해의 여름 햇차를 기대하면서 후덥지근하게 감기는 습기조차도 좀 더 즐거운 기다림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 제준태 원장의 열두 달의 수다(秀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