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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 베드 위에 환자분을 눕히고 체질맥진에 열중하고 있는데, 환자분이 누운 채로 “맥이 잘 안 잡히죠?” 하고 말하면 정말 그 순간 맥이 확 풀린다. 나는 그분의 맥(脈)에서 체질의 정보를 찾아내야 하고 그래서 집중해서 맥을 잡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무슨 문제냐?’고 내 반응에 의아한 느낌이 드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한의사의 진단 도구는 진맥(診脈)이다.’는 일종의 클리셰 (cliché)인지도 모른다. 전통 한의학의 진단법은 보고(望), 듣고(聞), 묻고(問), 만져보는(切) 네 단계의 절차를 거치는 사진법(四診法)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환자가 지닌 증상의 상태를 판별하는 데 이를 변증(辨證)이라고 한다. 보통 손목의 요골동맥을 살펴보는 맥진은 인체를 만져보는 진단법인 절진(切診)의 한 부분이니 그렇다.

서양의학에서는 맥박의 회수만을 체크하는데, 한의학에서는 맥을 통해서 여러 가지 다른 정보를 본다. 한의학에서 보는 맥상은 통상적으로 28가지로 세분되어 있는데, 대개는 맥이 떠 있는지(浮), 깊게 가라앉았는지(沈), 평균보다 느린지(遲), 빠른지(數)를 기본으로 두고서 다른 상태를 탐색하게 된다.

맥이 깊게 가라앉아 있고 또 힘도 약하면 보통 맥동이 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면 전통적인 한의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맥이 잘 안 잡히네요.” 위의 환자분은 한의사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럼 환자분을 통해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왜 맥이 풀렸던 것인가? 대중이 보기에 환자의 손목을 잡는 것은 똑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8체질의학을 하는 임상의가 환자의 손목을 통해서 체질맥진(體質脈診)을 하는 상황은 전통 한의학의 맥진과는 이론과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동 베드

요즘은 한의원의 구조가 대형화하는 추세라고 한다. 크기가 커진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대기실, 진료실 (진찰실), 치료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진료 방식에 따라 검사실을 두기도 하고, 근래의 대세인 원외탕전을 하지 않는다면 탕전실도 필요하다. 진료실과 치료실에 두는 침대는 옛날에는 나무로 짠 고정식이었지만, 지금은 재질도 달라졌고 상하 조절과 이동을 할 수 있는 침대를 쓰는 경우도 많이 있다.

아이 둘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시기에 지방 소도시에 있었다. 주말 오후에는 가족 모두 시립도서관에 가서 살았다. 또 그때는 국내에서 인터넷서점이 발전하던 시기였다. 인터넷서점에서 종종 할인 판매 기획행사를 하곤 해서 아이들 책을 인터넷을 통해서 자주 사주었다. 그리고 책을 사는데 만화책이라고 차별을 두지는 않아서 나중에 우리 집에는 만화책 전용 책장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들 책은 분량이 많지 않으니 책을 빌리거나 사면 나도 함께 보게 된다. ‘반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만화가 최정현의 책, 『하예린이 꿈꾸는 학교 반쪽이가 그린 세상』을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에 시선이 멈췄다.

그림 출처: 최정현 『하예린이 꿈꾸는 학교 반쪽이가 그린 세상』 한겨레출판 2000년 12월 p.140

한의 임상가에 8체질의학이 적극적으로 알려진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90년대 초중반에 동의학당이라는 한의사 통신망을 통해서 젊은 한의사들에게 전파되었고, 1990년대 말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공부 그룹이 생겼다. 만화 속에서 풋 스위치를 밟는 여자 원장님이 이 그룹의 멤버였다. 부부 한의사이기도 하고 당시에는 흔하지 않던 한의원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어서, 간혹 들러 자료를 보기도 하면서 그분이 8체질 임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화는 전동 베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사실 8체질로 임상을 하는 진료실은 아주 단출하다. 창시자인 권도원 선생의 진료실에는 원장 책상도 환자 의자도 없다. 환자는 진료실에 들어와 전동 베드 위에 올라가 누우면 되고 전동 베드에서 진료의 모든 절차가 이루어진다. 그러니 전동 베드는 8체질 임상의의 상징과도 같다. 만화가 최정현은 그 핵심을 잘 표현했던 것이다.

체질감별

사람에게서 8체질이란 여덟 가지로 다른 내장구조(內臟構造)를 말한다. 사람이 가진 체질적인 특성은 이를 바탕으로 발현되는데, 체형, 체취, 음성, 성품, 기호, 취미, 행동, 재능, 필체 등 다양한 면에서 표출된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체질을 감별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치료를 위한 감별 도구로 쓰이기에는 아직 체계적이지 못하다.

위와 아래는 금양체질인 두 사람의 필체를 비교한 것

체질의학 임상은 체질감별이 선결과제이다. 체질감별이란 그 사람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는 것과 같다. 그러니 문을 열지 못한다면 그를 파악할 수도 없고 병을 치료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혹 엉뚱한 문을 연다면 영 다른 길로 빠져버리게 된다.

8체질의학에서 체계화된 감별 도구는 바로 체질맥진이다. 위에서 나열했던 체질적인 특성 외에 체질마다 고유하게 발현하는 체질맥을 찾아내는 것이다. 체질맥은 1964년 말쯤에 권도원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다.

체질맥

사람에게는 8체질의 구분이 있고, 또 여덟 가지로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고유한 체질맥이 있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체질의 맥상(脈相)이 마치 언덕이나 산처럼 표현되어 있다. ‘8체질의 맥상표’는 표의 한계로 인해 2차원으로만 표시되었지만, 체질맥을 잡는 의사의 손가락 아래에서는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8체질의 맥상

체질맥진 손가락의 자세

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각 체질에서 체질맥은 왼쪽과 오른쪽의 맥이 쌍(雙)으로 있다. 의사의 오른손으로는 환자의 왼손을 잡고, 의사의 왼손으로는 환자의 오른쪽 맥을 본다. 전통 한의학의 맥진 방법에도 그런 경우가 있고, 일본의 경락치료파(經絡治療派)가 사용하는 비교맥진(比較脈診)은 의사의 양손으로 환자의 양쪽 맥을 함께 보는데 체질맥진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전동 베드는 우선, 바로 누운 환자를 의사가 맥진하기 쉬운 적당한 높이로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베드에 높이를 기억하는 기능이 있다. 체질맥진은 깊고 강하게 잡는다. 강하게 잡은 후에 맥이 보여주는 변화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분들이 이런 원리를 모르고서 그저, “맥을 정성껏 잡아주어서 좋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현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체질감별 도구는 체질맥진이다. 8체질 임상의 중에 체질맥진 말고 다른 도구를 주력으로 삼아서 체질을 감별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쓰는 도구가 훨씬 뛰어나다고 거창한 핑계를 대겠지만 결국엔 그가 체질맥진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의 손과 손가락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그러고 있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체질침

체질맥진을 통해서 체질이 감별되면, 환자가 호소하는 병증에 따라 적합한 체질침 처방을 시술한다. 전동 베드에 설정한 높이는 의사가 체질침을 시술하는 데에도 편하고 무리가 없도록 맞춘 것이다. 체질침을 시술한 후에 체질맥진으로 자신의 감별을 반복하여 확인하면 끝이다.

체질침 시술

© 이강재 원장과 떠나는 8체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