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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에서 1박을 한 여행길, 그냥 올라오기엔 밋밋했다. 바로 곁에 우뚝 솟아 있는 대둔산을 지나친다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올라간 산길. 3월의 어느 날이라기엔 너무나도 고마운 선물이 그곳에 있었다.

완주의 절경, 호남의 금강산

최근 몇 년간 3월에는 꼭 눈이 내렸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한정된 소식이긴 했지만, 이제는 3월의 눈을 기다리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그만큼 3월의 눈 소식은 이제 별난 것이 아닌 게 됐다. 오랜만에 길을 나서기로 했던 날에는 원래 비 예보가 있었다. 강원도 산간에 꽤 많은 적설량을 보일 거라 했지만, 전북 완주는 비교적 남쪽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지인들과 캠핑을 하기로 했기에 강수량을 예측하면서, 장비를 펼치는 게 괜찮을지 걱정을 하며 그렇게 길을 나섰다.

아침 일찍부터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예보대로 촉촉이 비가 내렸다. 겨우내 바짝 메말랐던 대지를 달래는 반가운 비였다. 오랜만에 맡는 비 냄새가 코끝에 닿을 때마다 좋았다. 비는 오후가 되면서 점차 잦아들었고 일행은 무사히 캠핑으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캠핑을 했던 박지는 대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칸첸중가를 비롯한 히말라야산맥을 누비던 이기열 산악대장이 운영하는 ‘나마스테’라는 카페였다. 너른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어 이렇게 캠핑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자리에서 올려다보면 웅장한 자태의 대둔산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대둔산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김제의 만경평야를 향해 뻗어나가다 금산 일대에서 독립적인 산군을 이룬 곳이다. 전라북도 완주, 충남 논산과 금산에 넓게 걸쳐 있다.

우리가 하루를 보낸 완주 지역, 그중에서도 운주면의 산면은 가파르게 솟아오르는 형국이다. 그 끄트머리에는 하얀 암벽이 하늘을 향해 민낯을 내밀고 있다. 그 광경이 멀리서 보아도 일품이다. 대둔산을 일컬어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산 좋아하는 이라면 대둔산을 한 번 이상 찾는다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만큼 멋진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이는 반전의 면모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의 위세는 그 산을 오르는 이에게는 버겁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대둔산의 과거 산행길에 가파르고 긴 철제계단을 놓은 건 그래서다. 이 계단을 두고 사람들은 ‘미친 계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일면이다.

 

다행인 것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이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1990년 11월 대둔산에 처음 케이블카를 설치했는데, 그 뒤로 대둔산을 찾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었다. 현재 운행 중인 케이블카는 몇 년 전 새로 설치한 것으로 선로길이가 927미터다. 산을 오르는 경사는 23도. 꽤 가파르다. 직접 케이블카에 타 산을 오르면 이게 얼마나 가파른 각도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해외의 케이블카는 여러 대가 레인을 따라 끊임없이 돌면서 사람을 실어 나르는데, 여기는 딱 2대가 서로 교행을 한다. 대당 20여 명 남짓 탑승이 가능하다. 최대 50명까지 탈 수 있다지만, 2대가 모두 움직여도 50명까지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하얀 봄의 선물

케이블카를 타면 산의 정상부까지 5분이면 도착한다. 케이블카가 아니었다면 대둔산을 ‘잠깐 둘러보고 간다.’라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상부 역사에 도착해 승강장을 빠져나가면 저 멀리 보이던 암석 봉우리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캠핑을 하는 사이 간밤에 좀 춥다 싶었는데, 이 위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3월 중순, 그야말로 하얀 봄의 선물이다.

상부 역사를 나오면 그때부터 철제계단이 이어진다. 이 계단도 제법 가파르다. 경사각이 25도 안팎은 될 법하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다리가 불편한 노년층도 난간을 움켜쥐고 지팡이를 짚으며 한 칸씩 위로 올라간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는 이에게는 약간 버거울 법한 계단이지만, 누구든 충분히 오를 수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겠다.

계단 50여 개를 올라갔을 때쯤, 눈앞을 가로막은 바위를 돌아서 오르면 비로소 대둔산의 절경이 펼쳐진다. 이날, 마침 밤새 하얗게 내린 눈과 봉우리 위를 뒤덮은 안개가 끼어 신비로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에 여기까지 오른 모두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모두가 이를 ‘선경’이라 불렀다. 오래전 수묵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아니 상상으로 그려냈을 신선의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법한 절경이다.

바로 앞에는 대둔산의 명물 금강구름다리가 놓였다. 이른바 ‘출렁다리’라 부르는 그 다리다. 금강구름다리는 오래전 이곳에 놓였는데, 2019년 정밀안전점검에서 재설치 권고를 받아 2021년 6월 다시 제 기능을 찾았다. 총길이 48미터에 1.2미터의 폭. 사람이 지나다닐 때마다 이 튼튼한 철제다리가 흔들거린다. 발아래는 얼기설기 철제 가닥으로 얽혀 있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겁이 날 법도 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지는 말기를. 멀리 앞을 바라보고 걷다 보면 다리는 금세 건널 수 있으니 용기를 내어 보길 권한다.

금강구름다리 건너는 눈앞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자리다. 뒤로는 암봉이 수놓는 선경을, 앞으로는 발아래로 뻗어가는 산맥의 흐름과 그 너머로 이어지는 인간의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수직으로 오르는 삼선계단이지만 이날은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발 디디는 곳마다 눈이 쌓여 있어서다. 봄의 눈은 습설이다. 습기가 많아 쉬이 녹기도 하지만 그만큼 매우 미끄럽다. 대둔산이 내어준 봄날의 선물을 받았으니 됐다. 다음에는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맛보기로 하고 하산을 결정했다.

 

상을 가득 메운 자연의 맛

대둔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온통 식당이다. 여느 산이 그렇듯 이곳 역시 대둔산에서 얻은 나물이며 버섯 따위로 음식을 하는 식당이 줄줄이 이어진다. 호텔 앞까지 늘어선 식당가를 지나 위로 오르는 경사로를 따라가면 바로 케이블카 승강장이 나오는데, 그 길목에 마지막 식당이 하나 있다. 이쪽 지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운주면 일대에서는 이 집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 만큼 유명한 집이다.

‘산산산’이라는, 다소 단순한 간판을 붙인 이 집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푸근하기가 이를 데 없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초봄, 실내를 데운 화목난로의 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상도 따스하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살살 녹인다. 메뉴판에는 뭘 시켜도 맛있을 것 같은 이름이 잔뜩 올라 있다. 마침 식당 주인이 더덕의 껍질을 벗기고 있기에 더덕구이 정식을 시켰다.

주문을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에 반찬이 깔린다. 대여섯 가지가 나오나 싶었는데, 그 뒤로도 서너 번을 더 오가며 반찬을 나른다. 가짓수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얼추 열두세 가지쯤 되는 것 같았다. 메인 메뉴인 더덕구이가 불판 위에 오르고, 그 곁에 오리구이가 놓였다. 이 집에서는 양념에 재워 구운 더덕을 오리고기에 올려 먹으면 별미라고 조언을 건넨다. 처음 가는 식당에서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고다. 큼지막한 오리고기 위에 더덕을 올려서 한 입. 아삭아삭 씹히는 더덕과 쫄깃한 오리고기의 식감이 대비를 이루면서 먹는 이에게 재미를 준다. 더덕의 향과 오리고기 특유의 향이 어우러지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도토리묵무침을 비롯한 온갖 산나물도 제각기 존재감이 뚜렷하다. 쌉쌀해야 할 것은 쌉쌀하고 매콤달콤해야 할 것은 그것대로 제맛에 충실하다. 젓갈의 맛이 적당히 스며 있는 김치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심지어 튀겨서 내 온 깻잎과 인삼은 어지간한 일식집 못지않은 솜씨다.

 

식사의 마지막은 된장찌개. 까만 집된장을 끓여서 내 오는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모습부터 입맛을 당긴다. 적당한 감칠맛과 집된장 특유의 구수함에 두부를 듬뿍 넣고 국물을 얹어 비비도록 만든다. 찬이 많은지라 식사 시간이 꽤 길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앞으로는 대둔산을 떠올리면 기어이 이 한 상이 연결 지어 떠오를 만큼, 다음에도 잊지 않고 찾아갈 만한 가치가 충분한 식당이다.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향이 일품인 더덕은 몸에 이로운 성분이 많은 뿌리채소다. 대표적인 것이 사포닌 (saponin). 이는 암세포 전이를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더덕에 많은 이눌린(inulin)은 기관지 질환을 다스리고 점막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염 작용도 뛰어나 염증을 예방하고 독소를 배출해주기도 한다. 더불어 각종 비타민과 플라보노이드도 상당해 면역력 강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