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CRIC

몇 년 전부터 10월이 되면 가려고 벼르던 곳이 있었다. 10년여 전 취재차 찾았다가 반했던 사찰, 세종의 영평사다.

하얀 구절초가 가득한 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보았던 풍경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차가 늘어서 있었다. 그만큼 가을이면 찾는 사람이 많았다. 영평사를 이렇게 유명하게 만든 건 구절초다. 이 꽃은 9월부터 시작해 11월까지 하얀 꽃을 피운다. 간혹 분홍빛이나 붉은빛을 띠는 꽃송이도 있지만, 확률적으로는 주로 하얀빛이다. 영평사는 들어가는 길목부터 곳곳에서 구절초가 보였다. 그러니까 가을철에 이 절을 찾아온다는 건 구절초를 보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영평사는 구절초로 유명하다. 매년 10월 첫째 주말에는 구절초 축제가 열린다. 이때는 정말 어마어마한 인파가 영평사에 몰렸다. 지금까지 수년간 가을만 되면 영평사 일정을 고민했지만, 코로나19의 터널이 길어지면서 다시금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이미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정확히 10년 만에 영평사로 향하는 차의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차올랐다.

영평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다. 문화재급의 전통 건축물만 6동이 있고, 토굴도 3동이 있다. 무엇보다 영평사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구절초다. 영평사는 경내뿐만이 아니라 영평사가 안겨있는 뒤편의 장군산까지 구절초가 가득 피어 있는 곳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영평사의 주지인 환성 스님이 일군 결과물이다. 스님은 장군산 자락에 자리한 영평사를 경영하면서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구절초를 옮겨 심어 온 산을 가득 메우도록 했다. 이런 풍경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충남 일대에서는 가을이면 영평사의 구절초를 찾아오는 이가 줄을 잇게 된 것이다.

이 절의 주지 스님은 경영자 마인드가 아주 뛰어나다. 하얀 구절초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어 낸 것도 그렇지만, 이 절만의 상품도 확실하게 개발해냈다. 절에서 직접 담가 만드는 장류다. 실제로 맛이 아주 좋다. 짠맛과 고소한 맛, 끝으로 갈수록 입안에서 맴도는 은은한 단맛이 일품이다. 주지 스님은 대놓고 자신의 장에 대해 “우주 최고의 맛”이라고 눙친다. 대단한 자신감이기도 하지만, 경영자로서 갖춰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스님의 말에 사 온 된장이며 간장의 맛이 좋으니 사람들도 다시 절을 찾아가게 된다. 정말 대단한 수완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평사로 들어갔다. 예전에 비해 훨씬 깔끔해진 모습이다. 절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확실히, 변화가 있었음이 느껴졌다.

실망 그리고 기대

10년 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충남 공주에 해당했다. 그 사이 행정수도만 만들어지면서 세종시로 편입됐다. 이것이 영평사에 있어서 호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오래가진 않았다. 이 무렵, 예전에 보았던 그 하얀 꽃의 축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절은 분위기가 꽤 바뀌어 있었다. 그사이 불사가 크게 일어나 절 마당 중앙에 큰 탑이 서 있었고,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건축물도 보였다. 그런 여파였을까, 구절초도 수가 많이 줄어 있었다. 절 전체가 구절초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그때 그 풍경은 이제 없었다. 절 뒤의 장군산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멀리서 보아도 산등성이에 온통 구절초가 피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물론 구절초는 여기저기 있었지만, 과거의 그 모습은 아니었다. 가득 찼던 기대는 사그라들고 실망이 밀려 올라왔다.

남아 있는 구절초 무더기를 찾아 산길을 올랐다. 대웅전 왼편 산길을 따라 구절초가 꽤 많긴 했다. 예전의 풍경은 아니었지만 다행이다 싶을 만큼 구절초는 많았다. 아마도 한차례 불사를 위한 공사의 여파를 겪고 다시 회복의 시간을 보내는 듯싶었다. 잔뜩 찌푸렸던 마음도 살살 녹아드는 듯했다.

가만히 앉아 구절초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참 예쁜 꽃이다. 요즘은 우리 야생화보다 외국 이름을 가진 꽃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 정작 우리 들판에 피는 꽃은 잘 모른다. 구절초 역시 샤스타데이지와 몹시 닮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실제 구절초를 샤스타데이지로 오해하는 경우를 숱하게 만난다. 화사한 샤스타데이지에 비해 구절초는 수수한 면모가 있다. 이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게 아니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매력이 있다는 말이다. 보면 볼수록 홀린 듯이 자꾸만 쳐다보게 한다.

10년 전에는 이 꽃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이 주변에 참 많았다. 장군산 자락을 걸으면 구절초를 따 차로 만드는 동네 아주머니를 곳곳에서 만나게 됐다. 커다란 박스에 가득 찬 구절초와 험한 일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주머니의 손이 참 인상적이었다. 박스에서 하얀 구절초를 가득 들어 올린 그네의 손을 사진으로 찍고 싶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산자락에 구절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어서다. 지금은 비록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저 생명은 다시 자라고 자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몇 년 뒤, 다시 이곳을 찾으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를 품어본다.

완성도 높은 막국수의 향연

최근 세종 일대에서 주목받는 막국수 가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기로 했다. ‘고운순메밀막국수’라는 이름의,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식당이다. 그런데 위치가 애매하다.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도 찾기가 어렵다. 도착지에서 건물을 끼고 우회전한 뒤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건물 뒤로 너른 주차장이 있고, 그 앞에 가게가 있다.

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냉면이든 막국수든 맛있는 건 다 환영이다. 냉면은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평양, 함흥의 두 가지 큰 선택지에서 별반 벗어나지를 못한다. 여기에 더해봐야 황해도식 간장냉면과 해물 육수와 육전을 주력으로 하는 진주냉면 정도. 막국수는 다르다. 막 갈아 만든 국수라 막국수인지 막 먹던 국수라 막국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막국수는 이런 것이라는 뚜렷한 틀이 없다 보니 여기저기서 변주가 이루어진다. 요즘에는 전국 어디를 가나 막국수 집이 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며 찾아 먹는 재미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주 일대는 예전부터 막국수 집이 더러 있었다. 그만큼 막국수로는 얘기해 볼 만한 고장이다. 더구나 근래 이쪽에서 아주 주목받는 집이 있다고 하니 안 가 볼 수가 없었다.

이 집의 주력 메뉴는 명태회 막국수와 들기름 막국수다. 들기름 막국수는 고기리 막국수가 ‘장원막국수’ 시절 아는 이에게만 팔면서 알려졌다. 맛과 담음새까지 모두 시초격이다. 들기름 위에 참깨와 김 가루를 수북하게 얹어내주는 식이다. 다른 막국수나 국숫집에서도 들기름 국수를 내놓고 있지만 고기리 막국수에 비견할 만한 곳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집은 눈을 번쩍 뜨게 했다. 고소한 들기름 향부터 콧속을 비집고 스며든다. 모양새는 고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 비벼 놓으면 맛도 훌륭하다. “오오” 소리가 나온다. 고소한 맛이 국수를 다 먹을 때까지 가시질 않는다. 이 정도면 세종 인근에서는 충분히 이름을 알릴 만하겠다.

이 집에서 진짜 추천하고 싶은 건 명태회 막국수다. 빨갛게 무쳐 올린 명태회 양념이 먹음직스럽고 거기에 김 가루와 볶은 참깨 가루를 적당히 더했다. 후루룩 한입 넣는 순간 쨍하고 선명한 맛이 혀의 미뢰 곳곳을 파고든다. 정말 맛있다. 매콤달콤한 맛의 밸런스가 매우 훌륭하다. 젊은 사장이 얼마나 노력해서 완성한 한 그릇인지 잘 느껴진다.

적당하게 잘 익은 명태회는 구태여 반항의 기색을 부리지 않는다. 잘 씹혀서 사라지는데 마지막에는 꼬숩기까지 하다. 곁들여 내준 물김치는 매콤한 맛에 물들 때쯤 얌전하게 입안을 정리해주는 기능을 한다. 동치미 국물도 맛이 선명하다. 소금의 짠맛이 적절하다. 이런 동치미, 정말 오랜만이다.

  

들기름 막국수는 아무리 맛있어도 고기리 막국수의 아류라는 평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반면 명태회 막국수는 속초식 명태 비빔냉면에서 따온 듯하지만, 이곳만의 명확한 맛이 있다. 둘 다 훌륭하지만, 기왕이면 이곳은 명태회 막국수의 성지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먼저 준 메밀차는 고픈 배를 달래기에도 좋지만, 식사를 마친 후 입가심으로도 훌륭하다. 면을 씹어 입안을 물들인 메밀의 고소함을 이 차로 배가시키는 기분.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차는 따뜻했다.

들깨를 짜서 만드는 들기름은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리놀렌산 (linolenic acid)이 함유돼 있다. 이는 혈관을 막히게 하는 콜레스테롤의 침착을 감소하게끔 만들어 준다. 더불어 피부 미용에 효과가 있어 주근깨나 기미가 많은 사람에게 좋다. 피를 만드는 조혈 작용이 뛰어나 빈혈이 있는 사람에게도 권할 만하다. 고혈압 예방이나 치료에도 좋은 식품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