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

진월인, 순우의, 편작의 형은 환자의 안색을 보고 병을 알았다고 한다. 아차산의 전설에서 맹인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임신한 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나 공주, 왕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다. 하지만 과장이나 와전은 있더라도 완전한 날조는 아니라면?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과학과 상상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진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사/석사

[경력]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인턴/레지던트 (한방내과 전문의)
국제인증수유상담가
대한모유수유한의학회 교육이사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김나희
김나희

신화와 전설이 허공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실존했던 상황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나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탐색해 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해주시면 더없는 칭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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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로물루스와 레무스: 왜 하필 늑대? 왜 하필 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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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쌍둥이가 엄마 늑대에게 거두어져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나 로마를 건국했다는 신화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쌍둥이의 이름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북유럽과 인도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창세 신화가 있다.



사람이 늑대 젖을 먹고 살 수 있을까?


버려진 사람 아이가 늑대 젖을 먹고는 살 수 있다. 하지만 캥거루 젖이나 오리너구리 젖을 먹고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늑대 젖에는 사람 모유의 핵심 탄수화물인 ‘유당’이 들어 있지만, 캥거루 젖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포유류는 哺乳類, 즉 ‘젖먹이 동물’이라는 단어 뜻 그대로 모유 수유를 핵심 특성으로 가진다. 그리고 모유를 생산하는 유선 (젖샘)의 기원은 피지선 (기름샘)이고 피지선의 기원은 모공 (털구멍), 곧 털이다.


약 2억 년 전 털이 등장했다. 털의 모공에 달린 피지선이 분화되어 유선이 되고 젖을 분비했다.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처럼 알을 낳는 단공류를 포함하여 모든 포유류의 공통 조상은 젖의 주요 단백질인 카제인 (Casein)을 만드는 카제인 유전자를 공유한다.


유당 (=락토오스, 젖당)은 1억 2500만 년 전 태반 포유류와 캥거루, 주머니쥐 등의 유대류가 분기한 뒤, 태반 포유류의 공통 조상 때 등장했다. 따라서 자궁 속 태반에서 태아를 키우는 태반 포유류의 젖에는 공통으로 유당이 들어 있다. 단공류와 유대류는 유당 대신 다른 종류의 올리고당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 아기를 위한 분유를 만들 때 오리너구리 젖이나 캥거루 젖은 후보가 될 수 없다. 한편 우유나 산양유를 사람 아기에게 먹일 수 있고, 야생에서 늑대 젖을 먹고 살아남은 소녀도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소, 산양, 늑대, 사람의 젖이 모두 유당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포유류에게는 같은 종의 모유가 압도적으로 이롭다.)



왜 하필이면 늑대일까?


왜 신화에 하필 늑대가 등장했을까? 늑대는 인간과 생태적 지위가 겹치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곳 주변에 서식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현재는 워낙 인간의 서식지가 넓어져 늑대들이 원래 서식지에서 쫓겨나고 개체 수가 줄어든 상태이지만, 예전에는 북반구에 광범위하게 서식했다.)


늑대는 인간처럼 사회적 동물이고 유대감이 강하기 때문에 늑대가 사람 아기를 돌보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일단 늑대와 사실상 같은 종인 개들이 아기를 돌보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인도에서 늑대가 키우던 상태로 구조되었다는 늑대소녀들의 이야기도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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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쌍둥이일까?


늑대에게 키워진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쌍둥이가 문명을 창시했다는 것은 언어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모티브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탄생 수수께끼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설명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자, 생각해 보자. 아이는 어른에게 문법을 갖춘 언어를 배워야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를 할 줄 아는 어른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어린 시절에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언어를 할 수 없다. (고립되었거나 학대당하다 구출 당한 경우 만 6세를 넘어가면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어른도 말을 못 하고, 어린이도 말을 못 배운다면, 우리의 언어는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수수께끼는 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외계인이 잠시 지구에 들러 선사시대 어린이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기라도 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KNH 0014-title-01.jpg  어른들은 문법 언어를 창조해 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언어 없는 어른들이 모여 언어를 만들 수는 없다.


KNH 0014-title-02.jpg  어릴 때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 언어를 배울 수 없다.


안드레이 바이쉐드스키 (Andrey Vyshedskiy)라는 신경과학자는 이 수수께끼들의 해법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설'을 들고나와, 7만 년 전쯤에 문법 언어가 최소 두 명의 유아에 의해 생겼다고 주장했다.


⦁ 두뇌가 호기심 많고 유연한 상태로 유지되는 유형성숙 돌연변이가 일어나, 약 2세에서 5세로 언어 습득의 임계시기가 늦춰진 유아가 둘 또는 그 이상 존재한다. (이 임계시기 전에만 문법 언어를 창조할 능력이 있다.)


⦁ 이 유아들이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떤다.


⦁ 유아들끼리 소통하는 과정에서 5세가 되기 전에 공간 지각 등의 문법 요소를 지닌 언어가 탄생한다.


⦁ 이 유아들이 자라서 문법 언어를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친다. (어른들에게는 못 가르침.)


어릴수록 문법을 창조하는 능력이 강하다는 것은 니카라과의 청각 장애 아동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수어 발달 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어릴수록 문법을 활발하게 창조했고, 큰 아이들일수록 작은 아이들이 만들어 낸 문법 요소를 그대로 따라 할 뿐, 창조하는 능력은 없었다.


흔하지 않은 돌연변이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밀착해서 자라나는 유아들이라는 조건을 생각하면, 이들은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신동이라도 혼자서 문법 요소를 만들고 유지하기는 어렵고, 말 상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문법 언어는 쌍둥이 아기들에게서 생겨났다는 것은 매우 개연성 있다. 늑대, 침팬지, 고릴라 등과 다를 바 없이 단순한 의사소통만 하던 호모 사피엔스가 문법 언어를 통해 문명을 만들어 간 과정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신화로 남은 것이 아닐까.



© 한의사 김나희의 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