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

진월인, 순우의, 편작의 형은 환자의 안색을 보고 병을 알았다고 한다. 아차산의 전설에서 맹인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임신한 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나 공주, 왕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다. 하지만 과장이나 와전은 있더라도 완전한 날조는 아니라면?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과학과 상상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진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사/석사

[경력]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인턴/레지던트 (한방내과 전문의)
국제인증수유상담가
대한모유수유한의학회 교육이사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김나희
김나희

신화와 전설이 허공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실존했던 상황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나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탐색해 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해주시면 더없는 칭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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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신화 (부제: 잡지 <스켑틱>의 편향과 편 가르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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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 스켑틱 25호에 실린 해리엇 홀의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에는 오류와 편향이 문단마다 나타난다. 길지 않은 이 글에서 명백히 거짓으로 확인된 내용만 일곱 가지이다. 아래와 같다.


KNH 0017-img-01.jpg 침이 중국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기원했다 -> 거짓

KNH 0017-img-02.jpg Paul Unschuld의 〈Medicine in China: A History of Idea〉에 침의 그리스 기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거짓

KNH 0017-img-03.jpg 침술에 대한 고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 거짓

KNH 0017-img-04.jpg 가느다란 침을 만들 고대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 거짓

KNH 0017-img-05.jpg 침 치료 효과는 모두 플라시보이다 -> 거짓

KNH 0017-img-06.jpg 중국의 중의학 이용률은 15~20%이다 -> 거짓

KNH 0017-img-07.jpg 마오쩌뚱은 침 치료를 받은 적 없다 -> 거짓


위 일곱 가지는 잠깐만 조사해도 사실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검증이 끝난 내용들이다. 따라서 실수로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니라, 침술이 미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고의로 쌓아 올린 날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운슐트 교수와도 직접 연락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저술과 관련하여 홀의 서술이 거짓이란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외에도 사실과 배치되는 내용이 다수 있으나,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거짓이 아니라고 빠져나갈 여지가 있는 것은 포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러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복합 질문의 오류,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체리피킹 (이미 폐기된 가설이 나오는 약 50년 전 원고를 인용), 문맥을 무시한 인용의 오류 (여러 번),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 감정이 실린 말을 사용하는 오류 (여러 번), 발생적 오류, 종개념과 유개념을 혼합하는 오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등을 찾을 수 있다. 그 외 감정을 실어 조롱하는 문장은 더 많다.


이 정도로 심각한 언론 윤리 위반이면 과학저술계에서 퇴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출판물도 아니라, 유사 과학을 검증하고 과학적 회의주의로 건전한 과학적 관점을 모색하는 잡지에서라면, 치명적인 부정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을 대표한다.’면서 거짓을 기술하면, 독자 공동체 및 사회의 신뢰를 크게 갉아먹을 수 있다. 황우석이 연구 부정행위로 영구 퇴출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과학에서는 진실성이 생명이다.


스켑틱 출판사 및 저자 해리엇 홀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2021년 한국 스켑틱에 공개 반박문을 보냈다. 나는 한국 스켑틱에 반박문 및 이를 미국 본사와 저자에게 보내 소통한 과정을 게재할 것, 언론 윤리를 위반한 해리엇 홀의 글을 싣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스켑틱은 반박문 게재 및 미국 스켑틱 본사 및 저자와의 소통은 약속하였으나, 홀의 글을 싣지 않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국 스켑틱은 이후에 발행된 간행물에서도 홀의 글을 꾸준히 게재했다.


나는 미국 본사 및 저자와의 소통을 위해 한국 스켑틱을 통해 영문 공개서한을 보냈다. 한국 스켑틱이 여러 번 미국 스켑틱에 연락하였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2023년 한국 스켑틱 33호에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에 대한 잠언>을 싣기로 했다. 그리고 33호 원고를 준비하던 중, 홀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박문이 실린 33호에도 홀의 글이 실렸으며, 한국 스켑틱 편집부는 ‘오랫동안 과학과 회의주의의 관점에서 생의학 분야의 칼럼을 써온 해리엇 홀께서 2023년 1월 11일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동안의 공로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책에 실었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동안의 공로라니 이 무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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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EPTIC Korea 한국 스켑틱 (계간): 33호. 2023. 03. 10.


이에, 스켑틱의 한계를 33호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3호에 실린 홀의 <낙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역시 침술에 대한 그의 글과 비슷한 오류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글에서 홀은 “낙태 반대 운동가들 중 일부는 자위도 살인이라고 주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합리적이고 대화할 수 있는 분파를 찾기보다는, 가장 극단적인 분파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면에 집중하여 조롱하는 태도이다. 이어 홀은 “강경한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친 한 남성이 자신의 십 대 딸이 임신한 것을 알자 곧 입장을 바꿨다더라.”라는 오래전에 읽었던 이야기를 꺼내 든다. 두 이야기 모두 참고문헌은 없다. 즉, 홀은 가상의 꼴사나운 사람을 내세워 저쪽 진영을 인신공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홀처럼 하자면, 반대로 ‘강경한 프로초이스였지만 원치 않는 임신 후 뜻하지 않게 태아를 생명으로 느끼게 되는’ 가상의 인물도 지어낼 수 있겠다.)


그런 뒤 홀은 잠재적 인간에 대한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화재에서 대피하는 과정에서 갓난아기와 냉동 배아 중 하나만 들고나올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구출하겠는가? 낙태 반대론자라고 해도 갓난아기를 구출하겠다고 할 테니, 아기보다 가치 없다는 것을 내심 인정하게 되겠지!>라는 것이다.


홀은 이런 유치한 답정너 사고실험을 내고, 자신이 낙태 반대론자들을 논파했다고 뿌듯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홀의 논지를 이어받으면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 자동으로 생성된다.


인큐베이터 없이는 생존 불가능한 재태 24주 초극소 저체중아 둘과, 건강한 만삭아 하나 중 어느 쪽을 구출하겠는가? 또는 24주 초극소 저체중아와 30주 저체중아 중 어느 쪽을 구출하겠는가? 몇 주부터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는가? 어느 아기가 더 가치 있는 생명인가? 장애가 있는 아기라면? 홀의 논리의 연쇄를 따라가면, 생명의 가치에 경중을 매기는 참혹한 결론이 나게 된다. 또한 아무리 낙태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도 화재에서 대피하는 길에 빈손에 마침 냉동배아가 보이면 들고나오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걸 보고 홀 식으로 “아무리 낙태 찬성론자라 해도 배아가 가치 있다는 것을 내심 인정한 꼴이 되겠지!”라고 말하면 유치한 논리의 비약이 된다.


홀은 낙태 반대론자들이 신뢰도 낮은 엉터리 연구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낙태 반대론자들이 연구에 명확한 결점이 있는데도 그 연구들을 믿는 이유는 ‘목표가 있는 추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짓말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뒤 홀은 이렇게 쓴다. “방법론적으로 결함이 있기는 했지만, 다수의 리뷰 논문은 낙태 시술이 자궁 외 임신의 위험을 높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방금 전에는 낙태 반대론자들이 방법론에 문제가 있는 연구 결과들을 믿는다고 하더니, 본인도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으로 결함이 있는 연구를 인용한다. 아전인수 격이다.


홀은 심지어 낙태가 이후의 임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라는 연구 결과들을 인용한다. 이전에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불임 치료를 받을 확률이 1.95%로, 시술을 받지 않은 여성의 5.14%보다 크게 낮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낙태 시술을 한 여성은 고혈압과 임신중독증에 걸릴 위험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난 연구도 인용되었다.


아무리 임신중절권을 옹호해도 너무 나간 것 아닌가? 게다가 필요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아 논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홀이 쓴 대로라면 낙태 시술을 받으면 난임이 줄어들고 임신 성공률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이건 서브그룹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조건임을 간과한 착각이다.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들은 수태 능력이 확인된 여성들이다. 낙태 시술을 받은 적 없는 여성들은 수태 능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당연히 후자의 난임 비율이 높게 되며, 두 그룹 일대일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그 외에도 어쩌면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들은 이후에도 임신할 계획이 없어 난임 치료를 적게 받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고, 낙태 시술을 받은 적 없는 여성들은 임신을 원하는 성향으로 난임 치료를 더 많이 받을 가능성도 있는 등, 두 서브그룹은 집단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낙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낙태 반대론자들 망신 주고 조롱하기? 낙태에 대한 다양한 논점들 살펴보기? 여성 건강에 대한 낙태의 효과 팩트체크? 마지막 팩트체크만 간단명료하게 했으면 꽤 괜찮은 기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롱의 마음을 가진 상태로 모든 논점을 일별하려는 무리한 시도로, 감정과 의견과 사실이 뒤섞인 결과가 나왔다. 침술에 대해 날조 글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홀은 낙태 반대론이라는 사이비를 깔 수만 있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목표가 있는 추론’을 해도 괜찮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홀은 “태아는 언제 인격을 갖는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동시에 낙태 반대론자들은 거짓을 믿고 거짓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라고 반복해 썼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낙태 반대론자들의 입장에도 일부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해야 옳을 텐데, 홀은 자신의 짧은 글 안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직시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미리 결정해 두고 그에 맞추어 낙태 반대론자들을 조롱하고 심지어 낙태는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막대 구부리기를 하면, 이 글 전체의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사람이라도, 낙태를 하면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말을 들으면 ‘헐, 그건 말이 안 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남성도 같이 책임지는 안전한 피임이 우선이고, 낙태는 그다음 선택인데, 홀의 논리대로라면 그냥 되는 대로 낙태를 해도 여성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과학은 비판과 검증을 통해 발전해 왔다. 끼리끼리의 내부 모임이 아니라, 모든 비판에 열려 있고 증빙되지 않으면 퇴출당한다. 그런데 미국 스켑틱은 공식적인 비판에 대해 1년 넘게 묵살하고 있다. 한국 스켑틱은 2021년에 비판 내용을 파악했으면서도 계속 홀의 글을 실음으로써 그의 발화 권력을 유지시켜주었다. 그리고 그의 공로에 감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것이 스켑틱이 말하는 과학적 회의주의인가?


과학적 방법론과 회의주의를 독점하는 태도는 과학적 회의주의와 거리가 멀다. 자신들은 비판할 수 있지만, 비판은 받지 않는다는, 마치 판옵티콘 (panopticon)의 감시자와 같은 시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보통명사 ‘과학’이라 불리는 서구 과학의 방법론은 현재까지는 가장 합리적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자만이나 남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고대 그리스, 중국, 아라비아의 과학처럼 얼마 동안 유지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수십 년 뒤 한계를 맞이할지, 수백 년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한편 젠더 편향적인 과학 연구의 문제점도 많이 지적되어 왔으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윤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지식 생산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의 영향 때문에 과학의 진실성과 과학자 커뮤니티 모두가 취약해진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담배 회사들의 연구 물타기로 담배의 해악이 밝혀지는데, 수십 년이 더 걸렸다. 분유 회사들도 비슷하게 자사 상품에 유리한 연구를 지원하여 전 세계 모아 보건에 악영향을 끼쳐 왔다. 무엇보다 석유 회사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들을 일부러 혼란에 빠뜨리는 연구를 지원하고 홍보해 왔다.


스켑틱의 글들에서도 이런 편향들이 발견된다. 마이클 셔머 (Michael Shermer)는 <민족 국가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다>에서 호텔, 거대 쇼핑센터 등을 도시라는 개념과 혼용하면서 우주 개척과 기업이 운영에 참여하는 거대도시들의 연합, 그로 인한 다문화, 다문명이 인류의 진보라고 묘사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석탄의 일생>은 석탄 채굴 과정에서 호주의 생태계와 마을이 파괴되고 분해되고, 석탄발전소를 세우면서도 한국의 생태계와 마을이 파괴되고, 송전탑이 지나가는 곳 역시 파괴되고, 석탄발전소 운영 과정에서도 마을이 미세먼지와 잿가루로 찌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셔머가 말하는 거대도시의 스마트함에는 이러한 착취가 숨겨져 있다. 생태계와 주변 마을을 착취하고 프랜차이즈로 전 세계 어딜 가나 천편일률적인 거대도시가 다문화라거나 인류의 진보라는 생각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다.


이윤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지식 생산은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의 영향 때문에 과학의 진실성과 과학자 커뮤니티 모두가 취약해진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셔머의 글은 지식 생산과 과학자 커뮤니티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례이며, 중립적인 과학이 실상은 정치적으로 우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도사 아미르의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은, 서구 출신에 (Western), 교육 수준이 높고 (Educated), 산업화 사회 (Industrialized)에 속하며, 부유하고 (Rich), 민주주의 (Democratic) 국가에서 태어난 편향된 피험자들로만 이루어진 심리학 연구가 한계를 가진다는 내용이다. 이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가 아마존강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을 포함시켜 설계한 연구가 나온다.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주면서 참을성을 시험하는 연구였다. 연구자들은 사탕을 중립적이고 무해한 인자로 보고, 사탕을 주는 것이 어떤 개입 (intervention)이라고 보지 않은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연구자들은 의도치 않게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나는 다시 한번 WEIRD의 한계를 절감했다. WEIRD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연구도 그 설계에서 WEIRD의 한계를 담고 있다는 걸 아미르는 자각하지 못하는구나!


단순당을 접하지 않고 사는 원주민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실험을 하면서, 그들의 치아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정제당의 맛을 어린 시절 접하는 것이 이후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 산업화 사회에서 사는 연구자들은 사탕이란 것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중남미 사회에서는 이것이 큰 사회 문제다. 정기적인 치과 검진 등의 의료전달체계,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공교육, 불소 첨가 수돗물 등 충치 예방을 위한 공중보건이 없는 사회에 코카콜라의 마케팅이 무차별적으로 들어간 결과, 놀랍게도 상당수의 중남미 사람이 이십 대에 치아를 몽땅 잃고 틀니를 하고 산다. 코카콜라를 el agua susia del capitalismo (자본주의의 더러운 물)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제의 똥물’이라는 한국어 표현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WEIRD의 한계를 돌파하자는 연구가 뜻하지 않게 ‘연구자 본인들’의 WEIRD의 성격을 드러냈다. 사탕이 아마존 원주민 사회에서는 중립적일 수 없다. 단순당은 원주민 아이들이 맛본 것 중 가장 달 것이고, 이 충격적인 기억은 그들의 인생에 남아 있게 된다. 단순당에 노출된 두뇌는 그 맛을 기억하여 갈구할 것이고, 치아는 충치에 취약해지고, 장내 세균총은 교란된다. 사탕은 중립적이지 않다. 설탕은 무활성 (inert)이 아니다. 그런데 사탕을 무활성의 개입이라고 설정한 것은, 사탕을 늘 접할 수 있고 늘 이를 닦고 치과에 가는 서구 산업화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연구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보타노프, 알렉산더 윌리엄스, 존 사칼룩의 <나쁜 심리 테라피들>은 33호에서 가장 빼어난 글이었지만, 심리 테라피들의 위험성에 초점을 맞추려다 생긴 과도한 해석이 발견되었다. ‘마음챙김’은 특정 사람들에게 불안, 우울, 불쾌한 의식 분열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저자들은 썼는데, 직접 해당 논문을 읽어본 결과 이런 부작용은 대부분 명상하는 도중에 느끼고 지나가는 사소한 것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신체의 감각을 더 집중해서 자각하게 되면 불편감을 더 명민하게 느끼고, 주의력이 흐트러져 무디게 느끼던 부정적인 감정들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것까지 위험한 부작용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것은 과도하다고 본다. 마치 침 맞을 때 따끔따끔한 것을 ‘통증이라는 부작용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라고 위협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침 맞을 때 따끔한 것처럼 마음챙김 명상을 할 때 부정적인 감각/감정은 잠깐 머무르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외 스켑틱 33호의 글들은 수준이 들쭉날쭉했고 어떤 글들은 참고문헌이 하나도 없기도 해서,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기준을 통과했는지 의심스러웠다.


현대 과학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현재 우리가 가진 가장 합리적인 도구라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홀을 포함한 일부 스켑틱 필진의 태도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사이비 과학, 유사과학, 기이한 주장’들을 반박하고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며 건전한 과학적 관점을 모색하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려면,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태도는 ‘과학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를 조롱하는 글쓰기로 설득하려는 태도는 과학적이지 않은데, 조롱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방어적인 태도를 불러내 오히려 전달하려는 내용에 더 적대적이 되도록 하는 반대 효과를 낼 뿐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라는 지적 겸손은 설득에 도움이 되며, 실제로도 누구나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늘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식을 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켑틱이 과학적 회의주의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고 비판에 열려 있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끼리끼리 ‘우리 편’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게재해서는 안 되며, ‘우리 편’의 오류 지적에 대해 눈 감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을 미리 내리고 그에 맞는 증거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켑틱의 과학적 회의주의는 그저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 한의사 김나희의 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