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화 노트

올해, 3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85년 대전대학교에서 시작하여 88년 모교 경희대학교에 돌아왔고, 2014년에는 단국대학교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에 대만 2회, 중국 1회, 미국 3회에 걸쳐 모두 6차례 교환 교수 활동을 하였고, WHO에서 5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3년을 대학 밖에서 지냈습니다.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비전 아래, 제가 한의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주도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자 보람으로 남습니다. 특히 5년간의 WHO 활동이 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의학을 위해서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러나 해내야만 했던 과업들을 완수하였습니다. 반대와 방해가 엄청났었지만 그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한의학의 큰 물줄기를 이끌었습니다. 후에 ICD-11 26장으로 진화한 전통의학 국제 표준 용어의 제정, 수백 년 이상 각 나라마다 달리 썼던 침구 경혈 위치의 통일과 국제 표준 제정, 일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CPG 가이드라인의 개발 등이 그것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Nature와 같은 저널이나 논문에 소개되었고 전 세계의 교과서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제는 후학들이 이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학력]
198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87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박사학위 수여
1989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과정 수료

[경력]
2021-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2020-현재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
2020-현재 미국 Emory의대 겸임교수
2008-현재 대만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
2014-2016 단국대학교 부총장
2003-2008 WHO 서태평양지역 전통의학 자문관
2011-2014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2008-201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2018-2019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2009-2011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 (GUNTM) 창립인·회장

[상훈]
2014.10 세계 표준의 날 ‘勤政褒章’ 수상
2015.12 경희한의대 동문회 ‘자랑스러운 慶熙韓醫人賞’ 수상
2022.02. ‘綠條勤政勳章’ 수상

[저서]
Koonja Press, Pajoo, 2021
<韓醫學原論> 군자출판사, 파주, 2020
<內經病理學> 통나무, 서울, 1993, 1995(2판), 1999(3판), 2001(중국어판, 중의고적, 북경)
외 10권 및 180여 편의 논문

최승훈
최승훈

한의학 세계화의 아이콘. 대전대, 경희대, 단국대에서 38년간 교수로 재직, 대만 중국의약대학과 국가과학위원회,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 Stanford 의대, Emory 의대 교환교수, WHO/WPRO 전통의학 책임자,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동양의학회 회장, Emory 의대 겸임교수와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로 Boston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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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북경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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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돌아와서는 학교나 협회에서 중국통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또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한의사들 가운데 화교를 제외하고는 중국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 교수 중에서는 전무했었다. 한편으로는 협회 정책기획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회에서 대만이나 중국과 접촉하는 기회가 생기면 대부분 내가 관여하였다.


1992년 여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던 날, 나는 북경에 있었다. 그날 새벽 천안문 광장으로 나가 마음속에 ”내년에 반드시 북경으로 돌아오리라.”라고 다짐하였다.


한국 한의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는데, 그중에 한의학이 대표적인 분야이다. 그 기간 한의사 제도가 사라졌고 사승(師承)은 단절되었다. 학문의 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겨우 돌팔이 수준의 한의약 기술이 이어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해방이 되어 한의과대학이 만들어졌다 해도 학문으로서 제 모습을 갖추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후진적이지만 중국은 전통의학 분야에서 거대한 흐름을 단절 없이 이어왔다. 더구나 마오쩌둥 시절부터 중의학은 헌법의 보호 아래 국가의 지원을 통해 정상적으로 유지 발전되고 있었다. 한국의 한의학에 비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우월함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80년대 중국에서 홍콩을 통해 들어온 중의학 서적을 보면서 실감한 바였다. 한의학의 가장 큰 특징인 ‘변증론치 辨證論治’의 의미에 대해서도 당시 한국 한의계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변증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한의학계가 인식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고 나서다. 그래서 나는 수교가 되면서 바로 그 중의학의 현실과 끝단을 보고 싶었다.


기회는 뜻밖에 찾아왔다. 92년 가을, 한중수교가 되고 나서 중국과의 교류가 봇물 터지듯 진행됐는데,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의 주지에(朱杰) 국장대행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협회의 요청으로 나는 주 국장을 수행하고 도와주었다. 떠나는 날 주 국장은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겠냐고 물어오길래,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중국에 가서 중의학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에서 객좌교수 초청장이 왔다. 대만에서 돌아온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지만, 조영식 총장님은 또 1년간 나의 중국 파견을 허락해 주셨다. 모교로 와서 5년 동안 세 차례의 교환교수를 나가는 특혜를 누리다 보니 주변에서는 내가 학교 집안사람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1993년 3월 초 북경에 도착해서 초청기관인 국가중의약관리국과 협의하여 앞으로 일 년간 근무할 기관을 중의연구원(中醫硏究院, 나중에 중국중의과학원(中國中醫科學院)으로 개명) 산하 광안문의원(廣安門醫院, 의원이 한국에서는 병원에 해당) 종류과(腫瘤科)로 정하였다. 큰 틀에서 보면 한의학이 중의학에 비해 뒤진 분야는 암 치료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우선으로 중의학의 암 치료 경험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광안문의원 종류과는 중국에서 중의학 종양 분야의 총본산과 같은 곳이다.


1955년 중국 정부는 중국 전역의 중의 전문가들을 북경으로 모아 연구기관으로 중의연구원을 만들고, 산하에 내과 중심의 서원의원(西苑醫院)과 외과 중심의 광안문의원(廣安門醫院)을 설립하여 임상 기구의 두 축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종류과는 중국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중의 및 중서의결합 방식으로 종양을 치료하였다. 1963년 위궤이칭(余桂清), 두안펑우(段凤舞, 북경 3대 외과 명의 두안허팅(段馥亭)의 아들), 장다이자오(张代钊) 세 분이 중심이 되어 종류과를 개설하였다. 나는 위 교수님과 두안 교수님으로부터 1년간 외래에서 직접 임상 지도를 받았다. 한때 나는 환자들 사이에서 두안 교수님의 아들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당시 과 주임이자 광안문의원의 부원장이신 박병규(朴炳奎) 교수님은 조선족으로 외과의사 출신이며 폐암 치료를 주로 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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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문의원 종류과의 위궤이칭(余桂清, 1921~2005) 선생님과 함께


박병규 교수님은 1955년 중의연구원에 오셔서 명노중의(名老中医) 두안허팅(段馥亭) 선생의 지도하에 중의를 연수한 외과의사 출신이다. 1960~1962년에 위생부(卫生部)에서 주관한 서의이직학습중의반(西医离职学习中医班)을 수료하고 중서의결합(中西医结合)으로 종류(肿瘤)를 치료하셨던 중국의 대표적인 중서의결합 종양 전문가다. 그는 종종 스스로 동원(東源)의 후예라고 하시면서 비위(脾胃) 위주의 처방을 즐겨 쓰셨다. 영어도 잘하셨다.


3월 초 병원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연수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당시 중국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중국의 대학, 연구소, 병원 등에 있으려면 연수비를 내야 했다. 병원에서 처음에 400불을 요구하여 나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매일 의사 가운 갈아주고 점심도 제공해 주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일 년에 400불이 아니라, 매달 400불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 “좀 더 생각해 보자.”라고 하면서 뒤로 미뤘다. 나의 신분이 그래도 국가 초청 객좌교수인데 매달 400불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또 앞으로 올 한국 교수들에게도 불리한 기준을 줄 수 있으므로 그대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3주 정도 시간이 흘렀다.


병원 측과 긴장 상태를 지속하다가 병원에서 매일 도움을 받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또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 같아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박병규 교수님을 통해 병원 측에 통보하였다. “좋다. 매달 4백 불을 내겠다. 그런데 일 년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있겠다. 한중간의 교량 역할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다음 날, 병원 측에서 “좋다. 무료로 한다. 당신은 이제부터 국가중의약관리국 객좌교수이면서 동시에 우리 병원 종류과의 객좌연구원이다. 다음 주 저녁에 당신 가족을 어선(御膳, 황제가 먹는 궁중요리) 식당으로 정식 초대하겠다. 이제 당신은 우리 식구다.”라는 답과 함께 한 달 가까이 끌었던 줄다리기가 끝났다.


그 해 연말에 황병태 당시 주중대사께서 북경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 교수 10명 정도를 시내 호텔 식당으로 초대해서 오찬을 한 적이 있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황 대사에게 한국 교수들이 내는 연수비를 면제하게 해달라는 민원을 하였다. 대학에서 매달 400불 심지어 1,000불까지 징수한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병원에는 가족들이 지낼 만한 숙소가 없어서 스스로 숙소를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 운이 좋게 북경에 나와 있는 삼성 파견 지역 전문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으로 북경어언학원(北京語言學院, 나중에 북경어언문화대학(北京語言文化大學)으로, 다시 북경어언대학(北京語言大學)으로 개명) 외국인 교수아파트 전가루(專家樓)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병원까지는 약 17km 거리이다. 처음에는 길이 낯설어서 택시를 대절하여 출퇴근하였다. 하루 왕복 한화 3,500원 정도라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고, 또 출퇴근 시간에는 차들이 많아 신호 한 번에 다 건너가지 못하고 또 몸도 근질근질하였다. 차창 밖으로 자전거 물결이 보인다. 자전거들은 한 번 신호에 다 건너가고 있다. 운동도 해야 하니 슬슬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북경에 있다가 상해로 옮겨가는 삼성 직원이 자신이 쓰던 자전거를 쓰라고 하길래, 손아래사람에게 공짜로 받을 수는 없고 시가로 쳐서 중국 돈 100위안을 주고 넘겨받았다. 분홍색 산악자전거 모양인데, 어처구니없게도 기어가 없다. 하기야 북경 전체가 평지여서 기어는 없어도 괜찮다. 자전거로 걸리는 시간은 편도 50분으로 매일 거의 두 시간 자전거를 타야 한다.


자전거를 타니까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 보면 땀이 나게 마련이다.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땀을 닦으면 종류과 내 전담 간호사 쉬라이샹(徐來香)은 “오늘도 자전거 타고 왔냐? 덥지 않냐?” 하면서 좋아한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교수가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의 생활을 한다는 동질감으로부터 친밀한 동료 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병동 회진과 콘퍼런스를 하는 수요일 오전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외래 병동에서 노중의(老中醫)의 진료에 동참하였다. 마주 앉아 환자의 맥과 혀를 보고 그분들의 처방전을 간호사가 먹지를 깔아 베껴 쓴 다음 모두 나에게 주었다. 그렇게 그곳 병원 생활에 젖어 지내다 보니 한때 내 스스로 중국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만에서 처음 시작한 중국어라 북경 사람들이 듣기에는 내 중국어가 조금 우스꽝스러웠던 것 같다. 미국 사람이 마치 부산 사투리를 쓰는 것 같은 모양이다. 나의 남방 사투리는 점차로 혀를 심하게 말아서 굴리는 북경식 중국어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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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일 년 동안 지냈던 북경어언학원 전가루. 귀국 후 5년 만에 아내와 다시 방문하였다.


북경어언학원에서 지내다 보니 거기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이나 대사관 직원들과 친하게 지냈다. 유학생들에게는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도 사주고 때로는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같이하였다. 우리 집은 점차 한국인 유학생들의 아지트로 변해갔다. 여름방학 때에는 그들과 단체로 36시간 기차를 타고 백두산에 다녀오고, 연말연시에는 학생들과 같이 운강석굴(雲崗石窟)도 다녀왔다. 대사관 직원 식구들과는 구이린(桂林)도 다녀왔다. 골동품 시장도 다니고.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가면서 병원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종류과 내에서는 우울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 해가 종류과 건립 30주년으로 논문 기념집을 만들어야 하는데 과에 돈이 없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출판비 전액을 기부하겠다.”라고 했다. 일 년간 택시 대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아낀 돈의 액수와 거의 비슷했다.


내가 다녀간 뒤로 대전대 조종관 교수, 원광대 황충연 교수, 문구 교수 등이 광안문의원 종류과를 다녀갔고, 국내에서 그분들은 암 치료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다.


귀국하고 난 다음, 그간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여 <동의종양학 東醫腫瘍學>이라는 책을 행림출판사에서 발간하고 강남 프리마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했었다.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한의학 종양 분야 전문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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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종양학 東醫腫瘍學>


북경에서 돌아와 바로 조영식 총장님께 귀국 인사를 드렸다. “우리도 하루빨리 한방병원에 종양과를 설치해야 한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한방병원 송일병 원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조속히 우리 한방병원에도 종양과를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총장님의 직접 지시니까 어쩔 수 없이 조금 진행하는 시늉을 했지만, 결국에는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로 유야무야시켰다. 아쉽고 아프지만, 그리 될줄로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냥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경희대 한방병원장을 지내셨던 유기원 교수님을 모시고 동의종양학회를 창립하였다. 유 교수님을 초대 회장으로 옹립하였고, 나는 2001년 스탠퍼드 의대 방문 교수로 가기 전까지 2대 회장을 하다가 부회장이던 최원철 광혜원한방병원 원장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현재는 대한암한의학회로 발전하여 학회로서 나름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