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항해 일지

현재 대한민국에는 5척의 병원선 (인천531호, 충남501호, 경남511호, 전남511호, 전남512호)이 의료시설이 취약한 섬을 돌며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작은 섬에는 병원은 물론이고 보건소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섬 주민분들은 기본적인 감기약 처방은 물론, 한의과 및 치과 치료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찾아가는 병원선에 많은 분이 진료를 받으러 오시며 특히 어르신분들께서는 한의 치료를 가장 선호하십니다.

공중보건한의사로 병원선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힘들지 않나'라는 걱정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라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2022년 한의대 졸업 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저의 생생한 기억들과 느낀 점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학력]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이메일]
djm04201@naver.com

박재량
박재량

병원선은 의료시설이 취약한 섬을 순회하며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가 진료를 보는 선박입니다.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병원선 근무자로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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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병원선 밖의 육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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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병원선이 뜨지 않을 때 저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무더운 여름은 썩 기분 좋은 계절은 아닙니다. 습한 날씨와 뜨거운 햇볕은 야외 활동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태풍이 자주 출몰하여 비와 심한 바람을 일으켜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유달리 태풍이 많았죠. 많은 지역이 비바람에 의해 침수되는 일도 발생하고, 정전까지 되는 등 큰 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병원선을 타는 공보의로서 태풍은 출항을 지연시키므로 다른 의미로도 싫습니다.


파도가 높거나 비가 많이 와서 시야 확보가 어려운 날에는 출항을 못 하게 되는데, 이러한 날을 예측하고자 매주 배를 타는 사람으로서 ‘윈디’와 ‘물때와날씨’ 이 두 앱은 매일 봐야 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손안에 휴대전화 하나면 일주일 동안의 바람, 파고, 풍속 등의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매주 출항 전 저는 이러한 정보를 보며 조마조마하게 다음 출항 일정 연락을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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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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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때와날씨



출항 그리고 휴가


인천시 병원선은 그래도 다른 지역의 병원선에 비하면 출항이 일정한 편입니다. 한번 출항하면 2박 3일 일정으로 진료를 보며, 날씨에 문제가 없다면 주로 화·수·목에 배가 뜨게 됩니다. 이렇게 배에서 2박을 지내면 2일의 대체 휴무가 나와 금요일부터 그다음 주 월요일까지 대체 휴무를 사용하여 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체 휴무는 제가 병원선에서 근무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배에서 아무리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제대로 씻지 못하더라도 휴일이 길다 보니 다음 출항 때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병원선의 경우 출항 일이 촘촘하게 잡혀 있어 휴가를 사용할 시간이 없어 휴가가 나오는 대신 월급을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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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이외에도 병원선이 뜨지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매년 하는 선박 점검 및 수리 기간에는 수리 의뢰부터 점검까지 한 달의 기간을 두고 출항을 못 하게 됩니다. 처음 배를 탈 때가 생각나네요. 한 달의 수리 기간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배의 이것저것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복귀하였는데, 전혀 바뀐 점이 없어서 의아해했습니다. 알고 보니 배의 내부인 엔진부터 외부까지 구석구석을 점검할 뿐 구조나 외형을 바꾸는 큰 수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건소


그렇다면 날씨가 안 좋은 날 배가 뜨지 않는다면 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배가 뜨지 않으니 당연히 대체 휴무가 나오지 않고, 병원선 공보의들은 병무청 소속임과 동시에 옹진군 보건소 소속 임기제 공무원 신분으로 보건소로 출근해야 합니다. 옹진군 보건소에는 따로 근무 중이신 한의과와 치과 공보의가 있어서 병원선 공보의는 보건소로 출근하더라도 진료는 보지 않습니다. 현재 보건소 공보의 선생님들 또한 진료를 보고 있지는 않으며, 주로 출장 업무를 통해 파견을 나가 진료를 보고 돌아오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보건소 내에서 특별한 업무가 없는 저희 병원선 공보의는 화상진료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개인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곳은 본래 인천시 옹진군 내 섬의 보건 진료소와 화상 연결을 통해 보건소의 의사 선생님이 진료를 보시는 공간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덕적도와 자월도의 주민들이 화상으로라도 진료를 볼 수 있으니, 환자들의 만족감이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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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진료실


보건소 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한 공간에만 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보건소 지하에는 조그마한 헬스 시설과 샤워실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종종 이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곳 직원들은 모두 업무에 치여 헬스장을 많이 이용하지 않습니다. 식사 후 밖을 걷기 힘든 날이면 종종 오셔서 러닝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보통은 헬스장을 거의 혼자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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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군 보건소 헬스장



모두가 기다리는 점심시간


하는 것도 없지만 점심이 되면 배가 고픕니다. 옹진군 보건소가 위치한 용현동은 주변에 맛집이 정말 많지만 무난하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은 보건소 바로 옆 옹진군청 구내식당입니다. 구내식당은 군청의 공무원이나 직원분들 그리고 보건소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으로 티켓을 저렴하게 구매하여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모든 식단은 영양사님께서 담당하여 메뉴가 구성되며 음식은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담아 먹을 수 있어 부족하지 않은 식사를 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운영하여 원한다면 하루 3끼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바로 옆에 야외 흡연 공간이 있어 흡연하시는 분들은 니코틴 섭취까지 한 공간에서 끝내게 됩니다. (담배는 몸에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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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구청 구내식당


사실 저는 구내식당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영양사분들께서 신경 써주시는 만큼 너무 건강한 식단으로 나오다 보니 아무래도 밖에서 사 먹는 조미료가 풍부한 맛을 느끼기 어려워 저에게는 맞지 않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보건소 출근의 유일한 낙 중 하나가 보건소 주변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용현동은 매일 새로운 곳들을 찾아가도 새로운 맛집이 계속 나오는 신기한 동네입니다. 심지어 차를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신포시장이 있어 신포닭강정을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줄을 서지 않고 사 먹을 수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차이나타운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는 공보의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메뉴의 맛집을 찾아가 봤으니,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께도 소개해 드리면 좋겠네요.



오케스트라


근무 시간 혹은 평일에는 인천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휴무일과 주말은 서울에서 취미 활동을 하곤 합니다. 다른 지역 공보의들과의 차이점이라면 아무래도 수도권과 가까운 근무지다 보니 수도권에서 운동, 악기, 친목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인데요, 저는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꾸준히 하였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 학교 내 오케스트라가 없어 6년 넘게 쉬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잡은 바이올린이 조금 낯설었지만, 저에게 옛 향수와 힐링을 주었습니다.


오케스트라 활동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의료계 밖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합니다. 많은 분이 본업을 하시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음악을 즐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새로운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꾸준히 연습한 결과 올해 5월에는 100분이 넘는 관객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도 하며 연습의 결실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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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봉사


병원선에서도 많은 환자를 보지만 조금 더 폭넓은 연령층과 질환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주말을 활용하여 의료 봉사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한의사로서 봉사 활동을 할 기회는 찾아보면 많이 있습니다. 그중 저는 열린의사회라는 자원봉사 단체와 함께하고 있는데, 국내뿐 아니라 해외 봉사 활동도 활발히 하는 곳입니다. 열린의사회는 의료취약 농어촌의 어르신은 물론,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노숙자 등을 대상으로 매주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의료봉사 이외에도 자연재해로 피해를 본 지역을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주기도 하며, 마을 환경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업무상 진료를 보는 것 외에 봉사하기 위해 찾아가 진료를 보는 것은 또 다른 뿌듯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 활동을 다닐 때마다 많은 사람이 한의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고 공보의를 하며 생기던 무료함을 극복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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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보의 박재량의 한의사 항해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