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임상연구를 이끄는 국가대표의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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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야. 그런 자부심이 있어요"
취재에 응해주신 이준환 부장님의 안경 뒤로 미묘하게 빛나는 카리스마가 전해져 온다. 대화 내내 '한국한의학연구원(이하 한의학연) 임상연구부 소속'이라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났다. 2012년 5월 침구경락그룹 선임연구원으로서 한의학연에서 임상연구를 시작하셨고, 얼마 전 임상연구부의 총괄을 맡게 된 이준환 부장님께 부서소개를 부탁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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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le check 1818.jpg 임상연구부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한의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치료하고 질환을 예방하고 진단하는 활동에서 의미를 가져야 하는 학문이거든요. 임상연구란 한마디로 임상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연구를 말해요. 임상연구부는 침구, 한약 등 한의학치료기술의 임상연구를 수행하여 효능과 안전성에 관한 근거, 한의 임상연구 수행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는 등 한의계 임상연구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신경영상(뉴로이미징) 기법을 활용한 한의치료기술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연구, 한의임상진료지침을 개발·보급하는 연구, 웹 기반 한의 종합 임상정보 제공 시스템인 신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연구,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조화되는 통합의학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의사분들이 임상에서 잘 쓸 수 있는 기술 등을 연구하는 부서가 임상연구부이고 따라서 한의학연의 타부서보다 한의사의 비율이 높아요. 절반 이상의 연구원들이 한의사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러나 영향력 있는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한의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타 전공 연구자들과의 협업이 필요합니다. 한의사들이 한의학 전문가로서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각 전공의 특화된 방법론을 다 알 수는 없거든요.


circle check 1818.jpg 다른 임상연구센터와 비교하였을 때 한의학연 임상연구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임상시험센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센터인 것이고, 저희는 임상시험을 포함해서 다른 유형의 임상 관련 연구 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또한 센터는 병원 내에 별도의 조직과 공간을 마련해서 운영하는 반면 한국한의학연구원은 공공기관으로서 현재 병원을 설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연구기관과 협력하는 공동연구를 많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원 선생님들이 이런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같은 경우도 부서에 계신 분도 있지만, 외부에 나가 계신 분들도 많으세요. 또한 임상연구센터의 경우는 교수님들이 진료와 교육을 병행하며 연구를 하시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저희는 업무 중 연구에 전담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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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연 임상연구부의 역사는 짧다. 지난 2015년 2월 연구조직을 개편할 때 신설되었으니 현재 6개월이 채 안 된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임상연구부의 역사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직개편 이전의 전신이었던 의료/한약/문화정보 연구본부가 그동안 한의학 임상연구분야에서 중추적인 연구들을 많이 맡아왔기 때문이다.


circle check 1818.jpg 그간 임상연구부의 성과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아시다시피 임상연구부는 올해 신설되었지만 전신조직이 있었습니다. 그 성과를 살펴보자면 우선 국내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다기관 임상연구(두 개 이상의 의료기관이 공통되는 연구계획에 의하여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임상시험연구)들이 많이 수행되었죠. 예를 들어 알러지 비염, 안면홍조의 침치료 효과를 규명한다든지, 최근에는 관절염의 뜸치료 효과를 규명하여 해외유명 저널에 출판을 했고요. 최근에는 만성피로증후군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또한 국민 입장에서 한의원에 대한 불만 중 하나가 여기 가면 이 치료하고 저기 가면 저 치료한다는 것, 즉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이 표준화를 강화하고자 한의사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임상진료에 대한 가이드라인, 즉 '임상진료지침'을 만듭니다. 지금까지 몇 개 임상진료지침이 발표됐고, 현재도 수많은 임상연구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에요. 그 밖에 동의보감의 광해군 때 간행된 이후의 학문업적을 업데이트하는 '신동의보감프로젝트'도 저희 부서에서 일부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버드 의대 마르티노스 센터에 연구원을 파견하여 fMRI을 이용해 침치료 효과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해외 유수 저널에 발표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해외 저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짜릿한 상상을 해보지 않은 한의학도들이 있을까. 그러나 보이는 부분은 꽤나 화려할지 몰라도 실상 그 밑에는 치열한 노력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일찍부터 관심을 접는 학부생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의계의 발전을 위해 연구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힘든 길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 과연 어떤 원동력이 한의학연의 연구원들을 연구자의 길로 이끄는지 궁금해졌다.


circle check 1818.jpg 부장님도 한의사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본인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맞습니다. 처음 제가 고등학교 때 한의학 전공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협소설과 드라마 '동의보감' 때문이었어요.(웃음) 입학하고 나서도 한의학의 재미에 푹 빠져서 학부생활을 열심히 했고요. 이후 경희대 한의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쳤고, 모교 병원에서 6년간 근무했습니다. 군의관 시절에는 자원하여 아프가니스탄 파병근무를 하기도 했고요. 연구자로서 보통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포닥(Post­doc; 박사 후 연구원)하는 전형적인 루트라고는 할 수 없죠.


circle check 1818.jpg 그러면 어떤 계기로 연구직에 들어서게 되셨어요?


전 이 길을 굉장히 늦게 알았어요. 학부 6년 동안 연구라는 활동을 접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현재도 진짜 일부의 학생들만 논문 쓰는 것을 한번 경험해보지 아마 저와 같은 경우가 많을 것이에요. 아무튼 인턴, 레지던트 시절에도 임상의가 되기 위해 환자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만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병원에서 자꾸 숙제로 논문을 쓰라고 하는데(웃음) 숙제하다 보니까 진짜 재밌는 거예요. 이후 직장을 옮길 때 임상의의 길로 갈 수도 있었죠. 물론 임상의가 나름의 보람도 크고 금전적 보상도 크지만 하는 일 자체에서는 연구가 더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연구원에 오게 됐는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돌아돌아 들어온 것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이고, 대개는 박사학위 이후 포닥을 하는 루트가 많고, 그런 분들이 실제로도 많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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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le check 1818.jpg 연구의 어떤 점이 재미있으셨어요?


가치 있는 일,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게 좋았어요. 초기에는 PubMed(의학학술지 전문 전자도서관-생명과학 및 생물의학 주제에 대한 참조 및 요약을 담고 있는 의학 정보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주로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자유 검색 엔진)에 제 이름의 논문이 올라왔을 때도 좋았고요.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책임감을 좀 더 많이 느낀다고 할까요.
대부분 한의사들이 임상에서 치료의 근거가 밝혀진 바가 없다고 불평을 많이 하세요. 그러나 우리(한의학연 임상연구부)는 비평을 넘어서 근거를 생산하려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전 세계 의학연구 기관에서 만들어내는 것에 비하면 한국한의학연구원의 논문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죠. 하지만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해왔고, 국내 다기관 임상연구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 임무들도 만들었고, 만들어내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이 할 거고요. 일단 근거를 생산해낸다는 근본적인 자부심이 있어요.
연구라는 구체적인 작업은 재미없을 때도 있겠죠. 우리도 논문 쓸 때 네다섯 시간 계속 앉아 있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되게 재미없어 보이거든요?(웃음) 하지만 이 일을 왜 하는지 그 목표를 따져보면 지적으로 굉장히 재밌는 활동인 것을 알 수 있어요.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해 내는 거잖아요. 독창성이 번뜩이는 작업이거든요. 그런데 이걸 느끼려면 자기의 아이디어를 조직화해서 결과까지 뽑아내는 교육이 필요해요. 어느 정도 경험과 훈련도 필요하고요.


circle check 1818.jpg 한마디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연구의 재미를 알 수 없다'고도 들리는데요. 학부생 때 그런 경험을 접할 기회가 있을까요?


우선은 저희 한의학연에서 진행하고 있는 URP 프로그램(Undergrate Research Program;학부생 연구 참여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URP는 학교 교수님 한 분, 한의학연구원의 연구원 한 분과 학부생이 조인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저도 참여해 봤는데 상당히 수준 높고 재밌는 연구 논문도 많이 나와요. 또는 연구를 활발히 하시는 학교 교수님을 찾아뵙고 ‘이런 연구를 해보고 싶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해도 되고요.
요즘 한의학 임상분야에서 안 좋은 얘기들이 많이 들리잖아요. 반면에 한의학 R&D 예산은 높아지고 계속 성장하고 있거든요. 그만큼 비전 있는 분야인데 인재가 유입 안 되는 이유는 학생들 입장에서 올바른 트레이닝 받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래서 한의학연에서는 그 부분이 신경이 가장 많이 쓰이죠.


circle check 1818.jpg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들어오시나요?


많은 분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오시지만 면허만 받으신 상태의 한의사분들도 들어오시는 경로가 있어요. UST(과학기술연합 대학원대학교)라는 학위 과정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들어오셔서 학위를 하실 수도 있고요. 연구 의지를 갖추고 있는 한의사 선생님이라면 일단 문을 두드려보면 본인 상황에 맞는 루트를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의학연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직원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는 어려움이 있어요. 좋은 인재를 뽑기가 힘들지만 한의학 연구라는 대전제를 위해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고 인재를 길러야 해요. 꼼꼼한 사람들도 필요하고 저돌적인 사람들도 필요하죠. 융합해서 자기만의 색깔을 내는 거니까요.


circle check 1818.jpg 연구원 생활하시면서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 조율이 많이 요구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비교적 회의가 많은 편이고요. 많은 프로젝트가 다른 기관과의 공동연구로 진행되기 때문에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한 출장도 상당히 잦은 편입니다. 필요한 경우 교육, 학회도 가고 해외 출장도 1년에 한두 번 정도 있죠.
공동과제는 한의학연 내에서 구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국내기관 또는 국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보통 연구원 개인당 2~3개 정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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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le check 1818.jpg 어떤 사람이 임상연구를 하는데 적합할까요?


연구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돼요. 연구를 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환자 치료하는 것보다 자기 이름으로 논문이 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표준화가 안 된 현실이 짜증 나서(웃음) 연구를 하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동기로 연구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분들의 공통점은 결국 연구가 좋아서 오는 거예요.
거기에 연구방법이 잘 훈련되어 있고 자기만의 스페셜리티가 있으면 좋은데, 없으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일단 들어오셔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전문가로 성장해가는 경로도 있어요. 임상연구부에서는 모든 한의사분들이 10년 후에는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서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하고 있습니다.


circle check 1818.jpg 연구를 꿈꾸는 학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의학이 기본이 되어야죠. 외연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다른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한 내 정체성은 결국 한의학이거든요. 그걸 어떻게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객관적 언어로,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바로 연구에요. 저마다 갖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고민들이 있을 텐데, 자기 내부에서 한의학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는가. 그 답을 외부전문가의 말을 통해서 얻으려 하기 보다는 본인의 의지로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사실 지금 그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스스로 직접 그 길을 두들겨서 뚫어서 간 사람들이거든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면 방법을 찾게 될 거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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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이준환 부장님은 인터뷰 후 35.2도의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출입증이 없는 기자의 사진 촬영을 위해 한국한의학연구원 이곳저곳을 동행해주셨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여유는 바로 이런 것일까 생각하면서, 나를 비롯해 더 많은 한의대생들이 학부생 때 연구를 경험해보면 좋겠다는 바람도 커져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얻은 교훈을 압축하자면, 문제가 있는 현실에서 절대로 불평만 하며 관망하고 있지 말자는 것이다. 임상의든 연구자든 교육자든 학부생이든, 어떤 위치에서도 '스스로 직접 길을 두드려 가는' 자세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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